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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848년 백악관 가스등 설치

입력 | 2008-12-29 02:58:00


“당신도 봤군요. 그렇죠,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어요. 난 내 상상인 줄 알았어요.”

폴라(잉그리드 버그먼)는 남편 그레고리가 집을 비운 사이 찾아온 런던 경시청의 브라이언 경위가 “가스등이 왜 희미해지느냐”고 묻자 감격해 이렇게 소리친다.

영국 런던 손턴스퀘어 9번가에 살던 오페라 가수 앨리스 앨퀴스트는 10여 년 전 살해됐다. 이 집을 상속받은 조카딸 폴라는 이탈리아에서 성악공부를 하던 중 그레고리를 만나 결혼해 돌아온다.

문제는 이때부터. 매일 밤 남편이 집을 나간 뒤 환하게 타오르던 가스등 불빛은 희미해진다. 이어 폐쇄된 다락방에서 들려오는 발짝 소리. 남편은 두려움에 떠는 그녀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외출을 금지한다.

앨퀴스트의 열렬한 팬이던 브라이언 경위가 폴라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결국 10년 전 살인범이 그레고리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앨퀴스트가 러시아 황제에게서 받은 보석을 빼앗으려던 그는 보석을 찾지 못하자 폴라와 결혼해 정신병자로 몰아붙인 뒤 밤마다 다락방에 가스등을 켜고 보석을 찾았던 것이다.

조지 큐커 감독의 1944년 영화 ‘가스등(Gaslight)’은 1938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패트릭 해밀턴의 연극을 영화화한 작품. 1880년대 안개 자욱한 런던 거리를 배경으로 했다.

석탄가스를 연료로 하는 가스등을 처음 실용화한 건 1789년 영국의 윌리엄 머독이었다. 19세기 초 런던에서 가스등이 사업화됐고 1820년에는 프랑스 파리에 가스 가로등이 설치됐다. 미국의 백악관에 가스등이 처음 켜진 건 1848년 12월 29일.

가스관을 통해 공급하는 가스등은 촛불, 등유를 이용한 랜턴보다 가격이 저렴해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 가스등의 보급으로 상류층 독서인구가 늘어 19세기의 문학은 크게 발전했다. 하지만 공장 근로자들은 근무시간이 연장돼 더 힘겨운 삶을 살아야 했다.

가스 가로등은 유럽의 도시를 한층 안전하게 만들었다. 20세기 들어 급속히 백열전구로 대체됐지만 런던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가스등이 일부 사용됐다.

어슴푸레 흔들리는 가스등은 식민지 청년시인 김광균의 예술적 감성도 자극했다. 1939년 25세의 시인은 일제하 도시민의 하릴없는 절망감을 ‘와사등(瓦斯燈)’의 어슴푸레한 불빛에 빗대 표현했다. ‘와사’란 가스라는 음을 한자를 빌려 적은 말.

“피부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까닭도 없이 눈물 겹고나/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