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법정 영화에는 검사와 변호인이 피의자의 형량을 놓고 협상을 벌이는 모습이 흔히 나온다. 피의자가 자백할 경우 가벼운 혐의로 기소하거나 구형량을 낮춰주는 ‘플리바기닝(plea bargaining)’이다. 미국 해군에서 컴퓨터 전문가로 일하던 한국계 로버트 김 씨도 1996년 간첩음모혐의로 체포됐을 때 이 협상에 응했으나 최고형이 선고된 사례도 있다. 이와 비슷한 제도에 면책조건부진술(immunity)이란 것도 있다. 피의자 겸 참고인이 제3자의 범행을 증언해주고 구형량을 감면받는 제도다.
▷임채진 검찰총장이 10월 플리바기닝의 필요성을 역설한 데 이어, 김경한 법무부 장관은 새해 업무보고에서 면책조건부진술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공무원의 뇌물수수 사실을 아는 상대방이나 관계자가 이를 증언해주면 진술자의 구형량을 깎아주겠다는 것이다. 특히 뇌물범죄는 주고받은 양측이 입을 다물면 딱 떨어지는 물증을 찾기가 쉽지 않아 수사에 난항을 겪기 십상이다. 최근 ‘노건평 게이트’와 공기업 수사에서도 드러났듯이 뇌물수법이 점점 교묘해지는 추세여서 검찰의 고충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사실 우리 검찰도 그동안 알게 모르게 이런 협상을 더러 활용해왔다. 김대중 정부 시절 현대그룹이 권노갑, 박지원 씨에게 거액의 뇌물을 전달했다고 결정적 증언을 한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을 기소하지 않은 것이 그런 사례다. 범죄자와의 협상에는 우려와 반대의 소리도 만만치 않다. 이 제도는 미국처럼 배심재판이 정착된 나라에서 수사와 기소, 재판 절차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태동했다. 진술거부권과 변호인 활동의 철저한 보장으로 자백을 받아내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미국의 독특한 제도라 할 수 있다.
▷범죄자와의 형량 흥정은 무엇보다 정의 관념에 반한다는 약점이 있다. 자칫 과학수사보다 협상에 주력하는 나쁜 풍토를 낳고, 밀실 협상으로 검찰에 대한 신뢰를 추락시킬 위험도 있다. 죄와 벌(罰)의 비례 원칙, ‘같은 범죄에 다른 처벌’이라는 형평성 논란을 부를 수 있다. 그런 제도보다 ‘형사 콜롬보’같이 바보처럼 끝도 없이 증거를 찾아 헤매는 검사가 많아져야 이 나라 검찰이 산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