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첫 파업때 “민영화” 주장
이번에는 “민영화 반대” 머리띠
한나라당의 7개 미디어관계법 개정안에 대한 반대를 명분으로 26일 파업에 돌입한 MBC 노동조합은 1987년 12월 창립된 뒤 이번 파업을 포함해 7차례 파업을 벌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는 보도국장 편성국장 직선제 요구나 사장 연임 반대를 내걸었으나 이는 경영권 침해라는 사측의 반대에 부닥쳤다. 이후에는 민주노총과의 노동법 반대 연대파업(1997년), 전국방송노조연합(방노련)의 방송법 반대 연대파업(1999년) 등 국회 입법 사항을 두고 정치 투쟁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1990년에는 KBS 노조의 서기원 사장 선임 반대 파업에 동조해 1주일간 제작 거부를 하기도 했다.
MBC 노조는 1988년 8월 26일 사측과 단체교섭이 무산되자 황선필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첫 파업을 벌였다. 노조는 당시 편집권 독립을 이유로 국장 추천제를 요구했으며 사 측에선 편집권이 경영진에 속한다며 맞섰다. 노조 측은 당시 MBC 지분의 70%를 KBS가 갖고 있는 상황에서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다며 ‘민영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파업은 30일 사 측이 황 사장 퇴진과 국장 중간평가제를 타협안으로 제시하면서 마무리됐다. MBC 노조의 두 번째 파업은 1989년 9월 노조가 편성과 보도국장 직선제와 제작 관련 10개 실·국장에 대한 정기적 신임 평가를 요구하며 시작됐다. 이를 둘러싼 단체교섭이 결렬되자 사 측은 노동부에 직권중재를 요청했으나 노조는 중재를 기다리지 않고 9월 8일 전면파업에 돌입했다. 9월 19일 편성 보도 TV기술국장의 경우 해당 국원들이 3명씩 추천하면 사장이 임명한다는 합의가 이뤄져 파업이 끝났다.
세 번째 파업은 1992년 9월 2일∼10월 22일 51일간 진행됐다. 당시 사 측이 편성 보도 기술국장에 대한 추천제 폐지와 높은 인건비로 인한 부담 경감을 위한 임금 5% 내 인상을 제안하자 노조가 이에 반발해 파업에 들어갔다. 손석희 당시 노조 파업행사팀장 등 7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노사는 국장 추천제를 폐지하고 공정방송협의회를 강화하는 선에서 파업을 종결했다.
4차 파업은 1996년 3월 13일부터 4월 4일까지 23일간 진행됐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가 강성구 사장의 연임을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노조가 파업에 들어갔다.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던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구속된 뒤 해직됐다. 회사가 6월 파업 관련자에게 징계를 내리자 노조와 MBC 기자협회가 집단 사표 제출을 결의했고 이후 강 사장이 물러났다.
다섯 번째 파업은 19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을 날치기 통과시킨 데 대한 민주노총의 총파업에 동조해 1997년 1월 7일부터 파업을 벌였다. 이 파업은 20일까지 지속된 뒤 민주노총의 지침에 따라 중단됐다.
여섯 번째 파업은 1999년 7월 김대중 정부 시절 국회에 발의된 방송법 개정안의 수정을 요구한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이 개정안은 정부 국회 시민단체 노조 학계가 공동 참여한 방송개혁위원회(방개위)의 논의 결과를 토대로 방송위원회 설치, 시청자 참여 프로그램의 명문화 등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전국방송노조연합(방노련)은 개정안의 수정을 요구했고 여당인 국민회의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MBC KBS 노조 등이 7월 13일부터 26일까지 파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방송위원회의 독립성 보장, 공영방송 사장 선임 시 인사청문회 실시 등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자사 이기주의에 치우쳤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방개위는 당시 MBC 민영화의 단계적 추진 방안도 내놓았다. 방노련은 국민회의와 방송위원회 위원장 등 추천 시 사유와 기준 명기 등을 합의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채 파업의 막을 내렸다. 이번 7차 파업을 벌인 MBC 노조는 국회 발의된 미디어 관계법 개정안이 MBC 민영화를 목표로 하며, 정권의 방송 장악 음모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치 투쟁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 동아닷컴 백완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