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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 인 메모리] “선동열 울리던 ‘꽃돼지’ 다시 뜁니다”

입력 | 2008-12-31 08:18:00


80년대 인천의 강타자 전 태평양포수의 회귀 김동기

1980년대 인천팬들에게 야구란 무엇이었을까. 슈퍼스타즈에서 핀토스로, 그리고 돌핀스로 넘어가는 질곡의 역사에서 팬들은 승리로 환호하는 날보다 패배로 가슴을 치는 날이 더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김동기(44)라는 걸출한 선수가 나타났다.

포수로서 두자릿수 홈런을 터뜨릴 수 있는 거포, 찬스가 오면 기대를 걸 수 있는 해결사. 상대에게 뭇매를 맞고 주저앉는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인천팬들은 그의 등장을 바라보며 비로소 처진 어깨를 자랑스럽게 으쓱거릴 수 있었다.

1986년 청보에 입단해 태평양을 거친 뒤 현대가 창단한 1996년까지 인천 도원구장을 누볐던 김동기. 인천팬들은 지금도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처럼 그를 추억하곤 한다. 은퇴한 지 12년. 그는 무얼 하며 살았고,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12년 만에 인천으로 돌아온 ‘꽃돼지’

현역 시절 별명은 ‘백돼지’. 장채근처럼 유난히 뚱뚱한 체격은 아니었지만 두툼한 엉덩이와 야구선수답지 않은 하얀 얼굴 때문에 생겨난 별명이었다. 안방마님으로, 강타자로 군계일학의 활약을 펼치자 그 별명은 어느덧 ‘꽃돼지’로 승화하기도 했다.

“은퇴 후 외지를 떠돌다 12년 만에 인천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그 하얀 얼굴은 그대로였고, 그 순박한 웃음 또한 12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여전했다.

그는 최근 건설사업을 접고 선후배들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인천으로 돌아왔다. 자신의 모교인 신흥초등학교 총동문회로부터 야구부 부활을 위해 구심점이 돼 달라는 부탁을 받았고, 그 스스로도 인천의 사회인야구를 튼실하게 만들고 싶다는 의욕 때문이었다. 현재 인천 연수구 옥면동에 200평짜리 실내훈련장을 만들어 사회인야구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보험, 감독, 건설사업…. 방황의 시간

96년 은퇴 후 그는 현대해상화재보험에서 2년간 근무했다. 넥타이를 매고 2년간 서울 광화문 본사 사옥으로 출근해 계열사 보험을 관리했다.

“정몽윤 회장님이 자리를 봐 주셨죠. 계열사 보험은 한달 실적만 해도 수십억원 짜리가 많았어요. 단체생활이야 어렸을 때부터 다져져 적응이 어렵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생소한 일이라 많이 힘들었죠. 이대로 사회생활을 할까도 했지만 야구 쪽에서 제의가 오더라고요.”

그는 99년 안산 중앙중학교 감독을 맡았지만 3년 만에 야인이 됐다. 방황도 많이 했다. 그러면서 건설사업에 잔뼈가 굵은 친구의 도움으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최근까지 경기도 화성의 아파트 건설현장을 누비며 토목공사를 했다.

그러나 몸속에 흐르는 야구의 피를 속일 수는 없었다. 사업을 하면서도 3년 전부터 주말이면 야구 불모지나 다름없는 경기도 가평에서 사회인야구 선수들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가평야구연합회를 만들어 8개팀을 구축했다.

“예전에 야구를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의욕이 대단했어요. 사실 사회인야구 선수들을 지도해서 돈을 벌 수는 없어요. 그야말로 봉사활동이죠. 그러나 그들을 지도하면서 보람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는 여기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았다고 했다. 야구저변 확대를 위해 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엘리트 코스를 밟은 인천야구의 대들보

인천고 3학년 때인 81년 제1회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6전전승 우승신화를 썼고, 인하대 시절 국가대표를 지낸 엘리트. 86년 청보에 입단했을 때, 당시 허구연 감독은 주전포수 김진우(작고)와 함께 번갈아 안방을 맡기면서 4번타자로 발탁하기도 했다.

첫해 규정타석에 미달됐지만 57안타 중 홈런 10개(9위)에 2루타도 14개. 모처럼 나타난 거포에 인천팬들은 우쭐했다. 87년부터 주전으로 올라선 뒤 태평양으로 갈아탄 88년 ‘김동기 돌풍’을 일으켰다. 전기리그에서만 홈런 10개. 게다가 0.379의 압도적인 타율로 타격 1위를 달렸다.

그러나 8월 12일 후기리그 MBC전에서 기습번트 후 1루를 잘못 밟아 발목인대를 크게 다치는 바람에 0.358의 타율로 시즌을 마감해야했다. 그해 타격왕은 0.354를 기록한 MBC 김상훈. 그는 규정타석에 미달했다. 그리고는 역대 인천연고팀 타자 중 타격왕에 오른 선수는 아직 아무도 없다. 그 역시 “지금 생각해도 선수 생활 중 가장 아쉬웠다”고 돌이켰다.

○인상적 홈런 2방으로 ‘선동열 천적’

그는 인상적인 홈런 2방으로 ‘선동열 천적’이라는 훈장같은 별명이 붙었다. 93년 0-4로 끌려가던 9회말 2사후 기적같은 동점 만루홈런을 때려낸 것도 그랬지만, 90년 9월 25일 광주에서 열린 시즌 최종전에서 선동열이 전년도부터 이어오던 ‘319.1이닝, 1186타자 연속 무피홈런’이라는 괴물같은 기록을 끝장낸 홈런포를 날렸기 때문이었다.

“선동열 투수는 1년 선배인데 3박자를 모두 갖춘 투수였어요. 공 잘 던지지, 수비 잘하지, 견제 잘하지…. 일생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홈런을 2방이나 쳤으니 잊을 수 없죠. 그런데 다음날 신문 보니까 선동열 홈런 맞은 게 더 크게 나오더라고요. 허허.”

○인천야구 새역사 쓴 팔방미인

89년 준플레이오프 상대는 원년부터 강호였던 삼성과 원년부터 약체였던 태평양. 1차전에서 0-0으로 진행되던 연장 14회말 2사 1·3루서 김동기는 ‘부시맨’ 김성길의 커브를 잡아당겨 끝내기 좌중월 3점홈런을 날렸다. 인천야구 사상 첫 가을잔치 승리의 감격이었다.

“그해 김성길에게 엄청 약했어요. 오기로 붙었죠. 여기서 끝내야한다는 생각으로. 인천 사람들은 지금도 그게 기억나나 봅니다. 얼마 전 식당에서 그때 얘기 하면서 사인을 요청하는 분이 계시더라고요.”

89년 김성근 감독이 이끈 태평양 돌풍은 박정현 정명원 최창호 등 마운드의 신예 3총사의 힘이 컸다. 그 이면에는 이들을 어루만지며 역대 포수 최초로 전경기에 출장한 김동기의 투혼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시절 김동기만한 방망이도 없었고, 마땅한 백업포수조차 없었던 태평양은 팀 사정상 그를 무리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결국 허리 디스크 증세는 고질이 됐고, 이후 오른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으로 96년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청보에서 태평양으로, 다시 현대의 창단까지 3개팀의 영욕을 함께 겪었다. 11년간 통산 1019경기에 출장해 타율 0.262(3101타수 812안타). 그는 인천야구 사상 최초로 100홈런(108개)을 넘긴 타자이기도 했다.

○사막에 홀로 피는 장미꽃

그는 “앞으로는 아마추어 야구계에 헌신하며 살겠다”고 했다. 우선 모교인 신흥초등학교의 야구부 부활을 위해 뛴 뒤 인천 사회인야구의 틀을 만들겠다는 포부다.

“유소년 야구도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저변확대가 중요해요. 사회인야구가 활성화되면 선수의 진로문제도 해결되고, 감독이나 코치 등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잖아요. 인천지역에만 사회인야구팀이 400개나 됩니다. 지금은 개별 리그로 활동하고 있는데 이를 통합해 사회인야구가 살 수 있는 길을 열고 싶어요.”

그는 장차 고교졸업 후 대학이나 프로에 진출하지 못하는 선수들에게 재수의 길을 터주는 꿈도 간직하고 있다.

“일반학생도 재수해서 대학 가잖아요. 그런데 야구선수는 대학이나 프로 진출에 실패하면 곧바로 낙오되는 게 현실이죠. 야구선수도 재수해서 대학이나 프로에 테스트를 받아 가야해요. 하나의 희망을 만들고 싶은 거죠. 제가 돈도 많은 것도 아니고 가진 것은 몸뚱아리 하나지만 열심히 하고 싶어요. 다행히 주위에서 후원해주시는 분도 많습니다. 프로 코치요? 나이가 있는데 제의가 오더라도 저는 가지 않을 거예요. 프로는 언제 잘릴지 모르잖아요. 인생살이 별 거 있나요? 돈이 많아야 행복하나요?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되지. 저는 지금이 좋아요. 보람 있어요. 그리고 행복해요.”

1990년 신인 김경기가 나타나기 전까지 ‘사막에 홀로 핀 장미’처럼 80년대 후반 인천야구를 외롭게 이끌어간 강타자 김동기. 그는 이제 사막처럼 황량한 풀뿌리 야구에 물을 주는 야구전도사의 삶을 그려가고 있다. 마치 희망을 전파하는 파랑새처럼.

인천 |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 |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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