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주, 2009 서울국제대회서 마지막 레이스
《동아마라톤이 올해로 80회를 맞는다. 1931년 시작된 동아마라톤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좌절, 환희와 분노로 점철된 겨레의 레이스였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인 고 손기정 선생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챔피언 황영조,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는 동아마라톤이 발굴한 스타였다. 동아마라톤은 남자 한국기록만 10개를 탄생시킨 기록의 산실이다. 2000년 서울국제마라톤으로 변신한 동아마라톤은 국내 최고를 넘어 세계적인 마라톤대회로 위상을 높여가고 있다. 엘리트 선수는 물론 마스터스 마라토너들에게 ‘꿈의 레이스’로 꼽힌다.》
‘국민 마라토너’ 이봉주(39·삼성전자)에게 3월 15일 열리는 2009 서울국제마라톤대회 겸 제80회 동아마라톤대회의 의미는 남다르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과 2001년 보스턴 마라톤 우승을 있게 해준 ‘마라톤 인생의 요람’이었던 동아마라톤에서 19년 마라톤 인생을 접게 됐기 때문이다.
“저를 키워준 동아마라톤에서 선수 생활을 끝내게 돼 영광입니다. 앞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동아마라톤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봉주는 늘 동아마라톤과 함께해 왔다. 1990년 전국체전에서 처음 마라톤을 뛴 그는 이듬해부터 동아마라톤에 출전해 지금까지 총 8회를 뛰었다. 1991년엔 2시간16분56초로 15등을 했지만 1995년엔 2시간10분58초로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1996년엔 생애 처음으로 2시간 8분대(2시간8분26초)를 뛰었고 그해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2위를 했다. 혹독한 지옥훈련이 은메달 획득의 발판이었지만 세계적인 건각들이 참가하는 동아국제마라톤을 통해 기량을 점검하며 레이스 감각을 키운 것이 큰 힘이 됐다는 게 오인환 삼성전자 감독의 평가다.
○ 총 8회 출전… 2007년 막판 기적의 역전극
이봉주는 1997년에 2시간14분25초로 13위를 한 뒤 국제무대에 나가느라 한동안 국내 대회를 뛰지 않았다. 2000년 도쿄 마라톤에서 2위(2시간7분20초)를 했지만 한국 기록을 세웠고 이는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다. 2001년 제105회 보스턴 마라톤 우승,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 금메달로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봉주는 2004년 서울국제마라톤으로 변신한 제75회 동아마라톤에서 다시 모습을 보였다. 당시 2시간8분15초의 좋은 기록으로 5위를 했다.
그런 이봉주도 30대 후반으로 접어드는 세월의 무게는 이길 수 없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14위, 2005년 베를린 마라톤 11위. ‘한물갔다’는 평가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봉주는 2007 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8회 동아마라톤에서 기적적인 역전극을 펼치며 경제난 속에 시름하던 국민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당시 케냐의 폴 키프로프 키루이에게 30m 이상 뒤져 있었지만 불굴의 막판 스퍼트로 2시간8분4초를 기록하며 역전 우승한 것. 37세의 노장임에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역전 레이스를 펼치는 모습에 국민은 열광했다. 무엇보다 이봉주는 승자라고 우쭐해하지 않고 패자라고 실망하지도 않으며 훈련에 매진하는 ‘늘 푸른 소나무’로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 “끝까지 최선”… 새해부터 지옥훈련 돌입
이봉주는 2008 서울국제마라톤에서 8위(2시간12분27초),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28위(2시간17분56초)로 주춤하며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봉주는 80돌을 맞는 올해 동아마라톤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지난해 12월 5일부터 제주도에 캠프를 차리고 훈련에 들어갔다. 새해엔 전남 장흥으로 장소를 옮겨 지옥훈련에 들어간다. 세계 엘리트 마라톤사에 유례가 없는 풀코스 40회 완주를 위해 이봉주는 새해 벽두에도 새벽 찬 바람을 가르고 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지유∼.” 이봉주는 마지막 레이스인 이번 동아마라톤을 경제위기로 우울한 국민과 함께 달리는 ‘희망 레이스’로 삼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