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낮춰 일자리 나누기… 닫힌 취업문 ‘상생의 열쇠’로 열자
《한국은 올해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와 함께 닥쳐올 ‘일자리 대란’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12월 12일 올해 경제성장률을 2%로 예상하면서 연간 취업자 증가폭도 2008년보다 10만 명 줄어든 4만 명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그나마 이는 낙관적인 전망에 속하는 편. 한국경제연구원은 성장률이 2.0%에 그치면 더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고 보고 있다. 일자리 감소는 사회 전반의 불안요소로 작용한다. 2005년 프랑스 폭동과 최근의 그리스 폭동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20%를 넘는 청년 실업자의 불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올해 정부 정책의 최우선 순위가 ‘일자리 창출’일 수밖에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실업급여 신청 급증… “계약직이라도 얻었으면” 아우성
고용 감소는 사회 불안 요소… 정부정책 1순위도 ‘일자리’
○ “계약직으로라도 일하게만 해 달라”
지난해 12월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서울남부종합고용지원센터 실업급여 강의장.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150여 명의 청강생이 강의실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실업급여 신청자가 급여를 받기 전에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강의다.
고용지원센터 직원은 “10월까지 참석자가 100명을 약간 넘는 정도였는데 11월 중순 이후 참석자가 크게 늘어 센터 내 의자를 모두 동원해도 부족할 지경”이라고 말했다.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10월까지 실업급여 지급자는 84만7710명. 2007년 같은 기간보다 9만9956명 늘었다. “내년 1년 동안 일자리 창출이라는 말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나빠 일자리 지키기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던 지난해 이명박 대통령의 우려가 벌써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버스회사에서 계약직 운전사로 일하다 최근 해고돼 이곳을 찾은 김모(58) 씨는 “계약직이라도 좋으니 일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줬으면 좋겠다”며 답답해했다.
밀린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진정서를 내러 온 정모(48) 씨는 “강릉 건설현장에서 3개월 일했는데 임금을 못 받았다”며 “계약서를 쓰자고 하면 일을 주지 않아 구두계약을 했기 때문에 증거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11월 신규 일자리는 7만8000개로 2003년 12월 이후 최저치를 보였다.
○ 취업 준비생도 고용 한파 직격탄
대학가에서는 ‘졸업 유예자’가 늘고 있다. 졸업생보다는 재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게 취업에 유리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정모(27·4학년) 씨는 “취업난으로 졸업이수학점을 1학점 남겨놓고 졸업을 1학기 더 미루는 학생이 많아졌다”며 “일단 대학원에 진학한 뒤 취업을 준비하려는 학생도 많아 대학원 입학까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대학 부설 취업지원센터에는 방학에도 학생들로 붐비고 있다. 지난해 12월 22∼24일 LG전자와 한양대가 함께 개최한 사전 직무교육에는 30명 모집에 75명이 지원했고 1월 중순 열리는 취업교육워크숍에도 모집 1주일 만에 90여 명이 몰렸다
지방 대학에서 수도권 대학의 경영학과 등 취업이 잘되는 학과로 편입하려는 열기도 높다. 학사편입 경쟁률은 2005년 4.57 대 1에서 지난해 9.01 대 1로 급등했다. 노동부에 따르면 권고사직 또는 계약 만료, 도산·폐업에 따른 비(非)자발적 이직자는 지난해 1월부터 11월까지 157만 명으로 2007년 같은 기간(137만 명)보다 14.6% 늘었다.
○ 일자리 나누는 상생의 지혜 절실
정부는 올해 경제운용방향의 목표를 ‘일자리 창출과 지키기’로 정하고 사회 서비스 일자리로 12만5000명, 중소기업과 공공기관의 청년인턴으로 4만7000명을 새로 고용한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하지만 대책이 질보다 양에 치우쳤다는 평가가 많다. 정부가 내놓을 수 있는 일자리 대책은 거의 다 나온 만큼 이제는 실효성이 관건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금재호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청년 인턴들에게 서류복사 같은 심부름만 시킬 게 아니라 공기업의 자체 훈련원 등을 활용해 교육과 훈련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영세 자영업자에 대한 지원과 전직을 위한 재교육의 필요성도 강조됐다.
김용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자영업자들은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중장년층이 많아 못 버티면 곧바로 빈곤층으로 떨어진다”면서 “영세 자영업자에게 일시적으로 고용보험을 지원하거나 재정을 동원해서라도 폐업 후 생활을 지원하고 전직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이번 기회에 임금을 낮춰 일자리를 나누는 상생의 지혜를 살리면서 사회 전반의 고(高)임금 저(低)효율 구조를 손질해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
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주요 선진국 노동시장 안정대책 쏟아낸다 ▼
獨 - 비정규직 실업급여 수혜기간 18개월로 연장
日 - 3년간 29조원 들여 140만명 고용창출 청사진
佛 - 구조조정 해고자 1년간 기존 월급 100% 지급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경기 위축이 심화되면서 주요국 정부는 일자리 지키기를 위해 기업들이 정리해고를 하는 대신 고용을 유지하도록 적극 유도하고 있다. 또 국가가 나서 새 일자리를 만들고 실업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을 확충하고 있다.
독일의 주요 대기업 대표들은 지난해 12월 14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경제 상황 악화를 이유로 직원들을 해고하는 걸 자제하기로 결의했다. 이 회의에는 노조 지도자들도 참석했다. 이와 관련해 페어 슈타인브뤼크 재무장관은 “대기업들이 자발적으로 고용 유지 정책을 취하고 인원 감축 대신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1월 발표한 경기부양 대책에서 비정규직 근로자의 실업급여(임금의 3분의 2 상당) 수혜 기간을 기존 12개월에서 18개월로 연장했다. 또 현행 3.3%인 실업 보험료율을 올해 1월 1일부터 2010년 6월 30일까지 한시적으로 2.8%로 내리기로 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해 12월 발표한 ‘신(新)고용대책’에서 고용기간 6개월 미만인 파견 근로자에 대해 기업이 훈련휴직 등의 방법으로 고용을 유지하면 비용의 3분의 2를 정부가 지원하기로 했다. 또 파견 근로자를 해당 기업이 직접 고용하면 근로자 1인당 100만 엔(약 1440만 원)을 지급한다. 이를 포함해 앞으로 3년간 모두 2조 엔(약 28조8000억 원)을 들여 140만 명의 고용을 창출한다는 계획. 이와 함께 비정규직 근로자의 고용보험 가입조건을 완화해 수혜자를 늘리고 재취업 및 훈련수당도 인상하기로 했다.
프랑스 정부는 지난해 10월 2억5000만 유로(약 4575억 원) 규모의 특별고용대책을 발표했다. 우선 최저생계수당 수급자 등을 대상으로 하는 국가보조 일자리 10만 개를 올해 새로 만들기로 했다. 또 구조조정으로 해고된 사람들에게 1년 동안 기존 월급의 100%를 주고 집중적으로 취업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직지원 계약’도 확대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프랑스 정부는 비정규직을 고용할 수 있는 조건을 완화하는 방안을 한시적으로 추진할 예정이다.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는 판단에 따른 것. 프랑스 노동법은 비정규직을 쓸 수 있는 조건을 11가지로 엄격하게 규정하고, 최대 사용 기간은 24개월로 제한하고 있다.
한편 세계은행은 최근 발표한 ‘위기 때 필요한 노동시장 프로그램’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서 “실업보험과 같은 소득지원 정책을 확대 강화하고 공공근로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라”고 각국 정부에 권고했다.
곽민영 기자 havefu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