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의 뿌리는 1959년 개국한 부산MBC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산MBC는 국내 최초의 민간 상업방송으로 꼽힌다. 2009년 새해는 민간 상업방송 50주년을 맞는 의미가 있다.
부산MBC를 만든 김상용 씨는 요정 카바레 장의사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부지런히 번 돈으로 라디오라는 문화사업에 뛰어들었으나 재정난에 봉착해 다른 사람에게 사업을 넘겨주고 말았다. 라디오에 이어 1969년 서울에서 개국한 MBC TV는 시작부터 기형적이었다. 허가를 따내기 위해 교육TV로 출발했다가 바로 상업방송으로 전환했다.
첫 상업방송에서 ‘노조 방송’으로
초창기 MBC TV는 호텔과 같은 건물에 있었다. 관광 진흥 차원에서 호텔 비품에 면세 혜택이 주어지는 점을 이용해 호텔과 방송국을 동시에 운영하는 것으로 당국에 등록한 다음 방송 기자재를 수입할 때 세금을 면제받았다. ‘호텔 속의 방송국’이라는 기이한 형태는 세계 방송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이 시기는 우리 방송의 여명기(黎明期)에 해당되므로 옛 추억담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컬러TV의 대량 보급으로 방송의 영향력과 책임이 막중해지는 1980년대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1980년 신군부가 강행한 악명 높은 언론 통폐합 때 MBC의 주식 70%가 KBS로 넘어갔다. ‘공영방송이 소유한 방송은 공영방송’이라는 묘한 논리로 MBC는 상업방송에서 공영방송으로 간판을 바꿔 달게 된다. 이윤 추구가 목적인 ‘주식회사’이면서 공익에 봉사하는 ‘공영방송’이기도 한 MBC의 정체성 분열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오늘날 MBC가 방송법 개정에 반대하기 위해 전파를 사유화(私有化)하고, 지난 정권부터 일부 구성원의 이념 전파 기지로 전락한 출발점은 1988년 제정된 방송문화진흥회법이다. 1987년 민주화의 결실로 방송문화진흥회라는 공익법인을 만들어 KBS가 갖고 있던 주식 70%를 넘겨줬다. 방송문화진흥회는 대주주 역할만 하고 경영은 회사에 일임했다. 이른바 소유와 경영의 분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MBC를 ‘주인 없는 회사’ ‘노조 방송’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책임이 요구되는 공영방송이지만 이 법을 통해 외부로부터 누구의 감사도 받지 않는 방송이 된 것이다. 강력한 노조는 ‘비판정신’이라는 가면 아래 노골적인 이념 지향성을 드러냈다.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은 2007년 MBC 사원들이 후생복지비용을 포함해 1인당 평균 1억 원 이상의 실질임금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종업원끼리의 회사가 망하지 않고 이렇게 흥청댈 수 있는 건 기적에 가깝다. 이들에게 ‘꿈의 직장’을 가져다준 사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전두환 정권이었다.
현재 국내 방송 체제는 전두환 정권 시절과 거의 같다. 중간에 SBS가 생겼고 케이블TV가 등장하는 일부 변화가 있었지만 MBC의 기득권 앞에선 무력했다. 2007년 방송광고 시장에서 MBC 계열은 지상파방송 몫의 41.5%를 차지했고 케이블TV를 포함한 전체 시장을 놓고 보면 30%를 가져갔다. 언론 통폐합 체제가 지금까지 MBC에 든든한 독점의 울타리를 쳐준 덕분이다.
밥그릇 지키려 신군부 논리까지
1980년 신군부가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내놓았던 당시 원칙이 있다. ‘언론의 사회적 영향력에 비추어 언론기관의 과점화는 공익과 배치되므로 어느 개인이나 법인이 신문과 방송을 함께 소유함으로써 민주적 여론 조성을 저해하는 언론 구조를 개선한다.’ 요즘 MBC 뉴스가 연일 전하는 ‘방송 공익성 침해’ ‘민주주의 파괴’ 등 신문방송 겸영의 반대 논리와 똑같지 않은가. 올해 미디어산업의 지각변동을 앞두고 자신의 독점 지대를 지키기 위해 구시대적인 신군부 논리까지 들이대는 셈이다.
MBC의 지난 50년을 보면 생물화학적 변이 과정을 거쳐 이상하게 변해버리는 영화 ‘괴물’의 장면이 떠오른다. MBC는 광우병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사회 전체를 흔들 수 있는 여론 지배력을 갖고 있다. 우리에게 이런 방송이 있다는 건 공포를 넘어 재앙이다. 이제는 MBC의 위상을 확실히 매듭짓고 넘어가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