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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화제! 이사람]KCC 추락에 속타는 허재 감독

입력 | 2009-01-02 02:59:00


“이제 다시 단신팀으로… 지금도 자신은 있어요”

지난해 10월 10일. KCC는 프로농구 개막을 앞두고 미디어데이 행사를 했다. 들뜬 분위기였다. 서장훈과 하승진이라는 ‘역대 최장신 더블 포스트’를 갖춘 허재 감독은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고 조심스러워 했지만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정규 시즌 반환점을 눈앞에 둔 1일 현재 KCC는 하위권에 처져 있다. 출전 시간을 놓고 갈등을 빚은 서장훈은 지난달 19일 전자랜드로 갔다. 공교롭게도 그날 하승진은 경기 중 발가락을 다쳐 이달 중순까지 출전할 수 없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KCC는 크리스마스에 8연패했다. 허 감독으로서는 구단 최다인 10연패를 당하며 꼴찌 수모를 겪은 2006∼2007시즌의 악몽이 떠오를 법하다. 오리온스와의 원정 경기를 앞두고 있던 그를 대구에 있는 KCC 숙소에서 만났다.

○ 여름내내 준비한 게 다 사라졌다

저녁 식사를 마친 허 감독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속 탈 때 태우는 담배가 어느새 하루 3갑으로 늘었다. 대신 통화는 부쩍 줄었다.

“친한 기자 전화도 거의 안 받아요. 기사에 살을 붙이다 보면 없는 얘기가 나올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제 얘기가 변명처럼 들리는 게 싫어요.”

KCC를 우승 후보로 꼽았던 많은 이들은 ‘스피드가 느린 서장훈-하승진 조합은 처음부터 맞지 않았다’고 말을 바꿨다. 높이에 집착한 허 감독이 판단을 잘못했다는 얘기도 했다.

“서장훈을 영입했을 때만 해도 신인 드래프트에서 하승진을 뽑게 될 줄 몰랐어요. 다른 팀도 기회가 왔다면 하승진을 선택했을 겁니다. 두 선수는 서로 상대방이 못 가진 장점이 있어요. 그걸 잘 살리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죠.”

허 감독은 지난해 여름 내내 높이를 살리는 패턴 연습을 했다. 이제 그 높이가 없다.

“다른 팀보다 키가 더 작아졌어요. 최고 선수들로 구성된 대표팀도 손발을 맞추려면 3개월 이상 걸리는데 남은 시즌이 3개월도 안 돼요. 하루빨리 스피드 위주의 패턴을 정착시켜야 하는데….”

○ “아직 초보 지도자로 배울 게 많다”

허 감독은 선수들에게 훈련을 시킬 때면 항상 남색 서류판을 들고 다닌다. 안에 뭐가 있느냐고 묻자 쑥스러운 듯 펼쳐 보였다. 깨알 같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깔끔한 서체가 인쇄물 못지않다.

“훈련 전날 우리 팀과 상대 팀의 최근 경기를 비디오로 돌려보며 작성해요. 이거 하나 만드는 데 3∼4시간 걸리죠.”

의외였다. 터프함과 카리스마가 먼저 떠오르는 그에게 이렇게 꼼꼼한 면이 있다니….

“더 잘 가르치고 싶은데 경험과 기억에만 기댈 수는 없잖아요. 감독을 처음 맡았을 때부터 시작해 한 장도 빼놓지 않고 모아뒀어요.”

그는 현역 시절 설명이 필요 없던 ‘농구 대통령’이었다. KCC가 ‘초짜 지도자’인 그를 감독으로 영입했던 데는 그런 이유가 컸다. 하지만 카리스마가 너무 강해 선수들이 되레 주눅이 든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 선수들에게 슛을 못 넣었다고 뭐라 한 적은 없어요. 슛은 타고난 자질이 필요하고 운도 따라야 됩니다. 하지만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수비에서 실책을 할 때는 싫은 소리를 하죠. 다만 전달 과정에서 선수들이 오해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선수는 혼자 잘하면 되지만 감독은 그럴 수 없어 더 어렵다는 허 감독은 “아직 초보 지도자로 배울 게 많다. 꼴찌로 마쳤던 2006∼2007시즌과 이번 시즌 가운데 어느 때가 더 힘들었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별 차이는 없다. 우승하지 못하는 감독은 누구나 그럴 것이다”라고 말했다.

선수로 우승을 밥 먹듯 했던 그는 2005∼2006시즌 감독 데뷔 이후 우승이 없다. 첫 시즌 5위를 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이듬해 꼴찌로 추락했다. 지난해 정규 시즌 2위를 했지만 올 시즌 다시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시즌 초에는 자신감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조용하던 허 감독의 목소리가 커졌다.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지금도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어요. 감독이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선수를 이끌겠어요. 선수들은 갖고 있는 능력만 발휘하면 돼요. 성적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집니다.”

시련의 세월을 겪고 있지만 ‘농구 대통령’의 자존심만큼은 여전했다.

▽허재 감독은

△생년월일=1965년 9월 28일

△키 188cm, 몸무게 80kg

△가족=부인 이미수(43) 씨와 웅(16), 훈(14) 2남

△출신교=서울 용산중-용산고-중앙대

△프로 경력=기아(1997∼98년), 나래·TG삼보(1998∼2004년), KCC 감독(2005년∼)

△국가대표=서울 아시아경기 (1986년), 서울 올림픽(1988년),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애틀랜타 올림픽(1996년)

△주요 수상=농구대잔치 MVP(1992, 1995년), 프로농구 플레이오프 MVP(1998년), 모범선수상(2003년), 베스트5(2000년)

대구=이승건 기자 why@donga.com


▲ 동아일보 이승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