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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소통]文人예술, 그 은은함에 취하다

입력 | 2009-01-06 03:00:00

소치 허련의 ‘일속산방도’(1853년)는 다산 정약용의 제자 황상에게 그려준 실경산수화다. 전남 강진군 천개산 백적동에 자리했던 일속산방은 다산의 유배지였으며 황상이 살았던 곳이다. 사진 제공 서울 예술의 전당

묵란의 대가로 이름을 날린 석파 이하응의 ‘병란도’(1887년). ‘석파난’은 근대 화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진 제공 학고재


‘소치 이백년…’ - ‘한국 근대서화의…’ 전

은은한 향기에 취한다. 손끝의 재주가 아니라 무르익은 인문적 교양이 녹아든 옛 서화의 아취. 어수선했던 마음이 고요해진다.

남종화의 한국적 수용과 확산에 기여한 소치 허련(小癡 許鍊·1808∼1893)과 그 화업을 이은 허씨 일문의 작품 100여 점을 모은 ‘소치 이백년, 운림 이만리’ 전(2월 1일까지·서울 예술의 전당 서울서예박물관)과 근대작가 37명의 서화 120여 점을 선보이는 ‘한국 근대서화의 재발견’전(7∼24일·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

서구 미술의 득세와 맞물려 평가절하된 근대의 전통 서화를 미술사적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는 자리다. 두 전시에선 문인예술을 완성한 추사 김정희가 남긴 ‘문자의 향기와 책의 기운(文字香 書卷氣)’의 전통을 엿볼 수 있다.

○ 운림산방과 한국 미술의 지평

남종화의 거장으로 꼽히는 소치는 초의선사 추천으로 추사 김정희를 만나면서 제대로 된 서화수업을 받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탈속의 정신세계를 작품에 녹여낸 그는 시골 출신임에도 붓 하나로 중앙에 진출해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하고 임금을 알현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자랑했다. 스승인 추사가 타계한 1856년, 소치는 화업에 몰두하기 위해 전남 진도에 낙향해 운림산방을 세웠다.

‘소치 이백년…’ 전을 통해 들여다본 운림산방의 화맥은 웅숭깊다. 예술의 전당과 국립광주박물관, 진도군이 소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마련한 전시는 시 서화에 두루 뛰어난 소치의 예술 세계를 구석구석 비춰준다. 동시에 미산 허형(米山 許瀅·1862∼1938),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 남농 허건(南農 許楗·1908∼1987), 임인 허림(林人 許林·1917∼1942)을 비롯해 허문(68) 허진(47) 씨로 이어지는 맥을 짚어간다. 이동국 학예연구사는 “국내는 물론 서구에서도 5대에 걸친 화맥은 보기 힘들다”며 “이 전시는 호남화단을 넘어 한국 미술이란 지평에서 소치의 예술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수묵의 가치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몽당붓을 이용한 거칠고 황량한 필법을 구사한 소치는 자유분방한 담채와 수묵으로 남종산수화를 토착화시켰다.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일속산방도(一粟山房圖)’는 관념적이라 평가받는 남종문인화의 대가가 실경을 그렸다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주제별 코너에 선보인 소치, 의재, 남농의 소나무도 주목할 만하다. 각기 다른 개성을 지녔지만 의연하고 꿋꿋한 기상이 관객을 압도한다. 일반 5000원, 학생 3000원. 02-580-1284

○ 근대 서화-답습과 혁신 사이

‘착한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은 지초와 난초가 있는 방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서화를 모아 놓은 ‘한국 근대서화의 재발견’에서 만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묵란첩’은 그윽한 아취를 풍긴다. 화분에 담긴 또 다른 난은 현대적 미감을 물씬 자아낸다.

대원군을 비롯해 김응원 안중식 박영효 조석진 이용우 등의 작품을 선보인 전시는 전통과 현대의 중간 지점에 놓인 근대 서화의 성과를 조망한다. 고루한 화법을 답습한 작품도 있으나 전통을 바탕으로 독자적 세계를 개척한 황철 같은 작가도 눈에 띈다. 우찬규 학고재 대표는 “흔히 개화기로 불리는 이 시기는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역사였기에 서화 연구마저 소홀했다”며 “편안치 않은 시절이지만 선인들이 암울한 시대에 피운 꽃을 통해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02-739-4937

오랫동안 외면당한 근대 서화의 명작을 보는 즐거움도 크지만 암울했던 시기를 견뎌온 이들의 발자취가 담긴 옛 서화에서 힘든 나날을 극복하는 용기도 얻을 수 있는 기회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