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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의회정치 업그레이드

입력 | 2009-01-07 03:00:00


“폭력-무능-반칙정치 퇴출… 국회 바로서야 나라도 선다”

영남지역의 초선인 A 의원은 요즘 지역구 주민들에게서 “국회 파행 사태에 절대 관여하지 마라. 몸싸움을 하면 다음 선거 때는 뽑아주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지난해 12월 한나라당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의 상임위 상정을 강행했을 때 국회에서 전기톱과 해머가 동원된 싸움이 벌어진 이후로 A 의원은 이런 얘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미국의 유력 일간지 뉴욕타임스와 영국의 BBC방송 등 세계 주요 언론들은 이 볼썽사나운 장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로스앤젤레스타임스는 여야의 충돌 장면 사진 여러 장을 싣고 아예 ‘한국식 정치(Politics, South-Korea Style)’라는 제목까지 달았다.

뉴질랜드의 한 의류회사는 한국 국회의원들이 멱살을 잡고 충돌하는 모습을 자사 와이셔츠 광고로 활용하기도 했다.

난장판이 된 정치권이 국가발전의 발목을 잡고 국격(國格)까지 떨어뜨리는 요즘, 국회의원 배지를 숨기고 싶은 의원은 A 의원뿐만이 아닐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입법부는 ‘정치 혐오증’과 ‘국회 무용론’의 역풍 속에 위기를 맞고 있다.

당장 급한 것은 여야의 극한대치 과정에서 실종된 의회정치를 복원하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만으로는 의회정치를 업그레이드할 수 없다. 의회정치를 다시 살리기 위해선 한국 정치에서 반드시 추방해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정치학자들은 한국의 의회정치가 파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로 당론만 있고 소신은 없는 정당의 집단주의 문화를 꼽는다.

의원들이 타협을 외면하고 당 지도부의 ‘돌격 앞으로’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현실을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계파 논리에만 충실한 패거리 정치가 더는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함은 물론이다.

또 다수결 원칙이라는 의회정치의 기본을 훼손하는 행위를 이대로 방관해서는 안 된다. 대화와 토론이 사라지고 폭언과 몸싸움, 반칙이 난무하는 현실에선 제대로 된 의회정치가 꽃을 피울 수 없다. 전문성을 결여한 무능력한 의정활동도 배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민생을 외면하는 무위도식 의회’에 대한 유권자의 감시가 지금보다 훨씬 철저해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부실한 의정활동과 난폭한 행동으로 지역구민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의원들이 다음 국회에서도 활개 치는 풍토가 바뀌지 않는 한 한국 정치의 미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정훈 기자 sunshade@donga.com

정원수 기자 needjung@donga.com

▼국회 매달1일 자동개회… 국정감사 상시체제로▼

‘일하는 국회’ 보고서 곧 제출

국회운영제도개선자문위원회는 여야 정쟁의 장이 돼 버린 국회를 ‘일하는 국회’로 개선하는 방안을 담은 보고서를 조만간 국회의장에게 제출한다.

이 개선안에 따르면 9월 정기국회 외에 짝수 달마다 여는 임시국회를 매월 1일 자동 개회해 상시 국회가 되도록 했다. 정기국회로 업무가 편중되면서 국정감사와 예산안 심의가 부실해지고, 법안이 무더기 졸속 처리될 우려가 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9월 정기국회에서 전 정부기관을 상대로 동시다발로 진행했던 국정감사는 ‘상시 국감’으로 바꾸도록 했다. 일종의 연례행사처럼 형식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국감은 실효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상임위별로 1년 내내 자율적으로 감사를 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예산결산특위는 상설 특위로 전환해 심의의 전문성과 계속성을 확보하도록 했다. 매년 정기국회 때 예결특위를 새로 구성하는 현행 방식으로는 특위 위원의 교체가 잦아 예산안에 대한 실질적인 심의를 원천적으로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본회의 대정부질문에선 국무총리가 답변하고, 정부 각 부처 장관은 소관 상임위의 정책청문회에서 답변하도록 했다. 그동안 대정부질문은 순수한 정책 질의가 아니라 야당이 정치 공세를 벌이는 장으로 활용된 측면이 작지 않았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 요건은 현행 ‘의석수 20석 이상’에서 ‘의석수 10석+정당 득표율 5% 이상’으로 완화하기로 했다. 소수 정당의 의회 내 발언권과 정치적 책임을 높이겠다는 취지에서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무조건적 물갈이보다 옥석 가리는 공천을

심지연 경남대 정치외교학 교수

리더십의 회복이 급선무다. 3김(金)시대 이후 한국 정당에는 확실한 리더십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권위주의에 대한 해체가 권위 그 자체를 해체시킨 모순을 낳고 있다. 보스에 의한 ‘돈 정치’가 사라지면서 과도기적 리더십 공백기를 겪는 측면도 있다.

의원들의 투표로 선출된 원내대표지만 그들의 협상 결과가 당론을 구속하지 못하는 기형적인 구조다. 선진국 의회의 리더십은 시니어리티(Seniority·중진)에 대한 경외심에서 출발한다. 다선(多選) 의원에 대한 존경심은 복잡한 문제를 풀어나가는 힘의 원천이 된다. 무조건적인 물갈이보다 옥석을 가리는 공천시스템이 자리 잡아야 한다.


윤리위 외부인사 포함시켜 기능 강화해야

양승함 연세대 정치외교학 교수

관용의 정치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여당은 수(數)의 정치 유혹에서 벗어나 정책의 정당성을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야당은 권위주의시대의 투쟁 방식으로 의정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소수 지지세력을 의식하기보다는 차기 선거에서 국민적 지지를 받는 것을 목표로 움직여야 한다.

또 유명무실한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의 기능을 실효성 있게 만들어야 한다. 운동경기에서처럼 반칙하는 의원은 경고하고 퇴장도 시켜야 한다. 의원만으로 운영할 게 아니라 외부 인사도 포함시켜 배심원제도로 운영해야 한다. 감봉을 하거나 일정 기간 의원활동을 정지시키는 징계 방식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투쟁성보다 전문성 갖춰야 국정감시 가능

이내영 고려대 정치외교학 교수

미국처럼 상임위별로 전문가들이 있어야 한다. 미국은 국방위원장이 국방부 장관보다 전문성이 높고 권한도 막강하다. 대통령이 주요 정책을 펼 때 여야를 막론하고 상임위와 협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회의 주요 기능은 행정부를 견제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또 법안을 만들고 사회 갈등이 거리에서 표출되지 않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그런 기능을 하려면 국회의원들의 전문성이 있어야 하는데 한국은 전문가들이 아니라 싸움 잘하는 사람이 의회를 이끌고 있다. 의회가 전문성을 갖춰야 의회정치의 패러다임이 권력쟁취형에서 생산성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게 된다.

당론만 있고 소신 없어… 의원 자율성 보장을

임성호 경희대 정치외교학 교수

한국의 의회정치가 파행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집단주의적 획일성’이 정당정치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헌법기관이지만 이들은 집단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해 왔다. 개인의 소신과 양심이 아닌 당론과 정당 간 합의가 행동의 준거가 되는 지금의 정치문화가 바뀌지 않으면 다수는 강행 처리, 소수는 실력 저지라는 악수(惡手)를 반복하게 된다. 한국 정치에 필요한 것은 집단주의를 극복하고 개별 의원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는 것이다. 의회정치가 발달한 선진국에도 당론은 존재하지만 개별 의원의 소신대로 표를 던지는 ‘교차투표제도’가 활성화돼 있어 복잡한 문제를 비교적 쉽게 풀 수 있다.

다수결 원칙 무시는 국민을 무시하는 행위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민주주의의 기본원칙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한국 국회에선 다수결원칙이 무시되고 책임정치가 실종되고 있다. 현재 82석의 민주당은 172석의 한나라당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하려고 한다. 국민이 만들어 준 의석수는 안중에도 없다.

미국 의회는 상임위원장 자리를 다수당이 독식한다. 다수당에 전권을 위임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책임정치의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소수당은 필리버스터(Filibuster·장시간 연설 등의 의사진행 방해)제도를 통해 여당을 견제하지만 표결을 통해서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다. 소수 야당의 합법적인 견제장치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반칙의원 표로 응징… 유권자가 바꿔나가야

장훈 중앙대 정치외교학 교수

1980년대 민주화 열풍으로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팽창하는 과정에서 의회정치 위기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민주주의는 ‘제도의 정착→사고와 행동의 변화→문화적 성숙’의 3단계를 거쳐야 발전하는데 사고와 행동이 제도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외국 의회가 한국 국회와 가장 다른 점은 법안처리 과정에서 의회가 룰을 철저하게 지킨다는 점이다. 의회정치 발전을 위해서는 편법과 야합의 관행부터 단호하게 끊어야 한다.

민도(民度)가 정치 수준을 극복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폭력 의원을 선거에서 응징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은 전적으로 유권자에게 있다. 유권자가 바뀌어야 한국 정치가 달라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