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10만 원권 화폐의 발행을 무기한 연기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 대신 5만 원권이 4월 중 시중에 나온다고 한다. 기사에 나온 기획재정부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신용카드 사용이 늘어 고액권의 필요성이 줄었으며 물가가 오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색하기 짝이 없다. 10만 원권 발행을 연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실상 취소하려는 계획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새 화폐에 우리 과학자 얼굴 올리기 운동을 2004년 2월에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 우리 화폐에 과학자의 얼굴이 올라오기만 학수고대했다. 다음에는 과학자의 차례가 반드시 오겠지 하고 기대했다. 물론 결과는 항상 실망스러웠다.
최근 경제상태는 1997년 외환위기 때와 거의 비슷한 것 같은데 역사를 알아야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는 말이 더 실감난다. 당시 경제위기에서 피해를 가장 많이 본 분야는 역시 과학계였다고 볼 수 있다. 위축된 연구투자로 인해 많은 과학자가 다니던 직장을 나와 거리를 헤맸던 뼈저린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우리나라를 2만 달러 시대로 다시 부상시킨 주역은 개별 연구영역을 헌신적으로 지켜주고 세계 최고를 지향했던 바로 과학자들이 아닌가?
고액권 도안을 2007년 논의할 당시에 전국의 과학도들이 우리나라에서도 과학자의 얼굴을 새 화폐에 넣어야 한다는 의견을 적극적으로 한국은행에 전달했지만 마지막 결정 과정에서 탈락돼 스스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2004년 초 서울 청계산 입구에서 새 화폐에 장영실 초상을 올리자는 캠페인을 시작할 때 연세 많은 어르신들께서 왜 하필이면 장영실이라는 여자를 남자들이 나와서 선전하느냐고 핀잔을 줬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선조 과학자에 대한 국민의 의식이 많이 향상된 사실이 한편으로 흐뭇하다. 적극적인 홍보와 교육을 통해 선조 과학자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애정을 높일수록 과학 분야에서의 선진화가 가능하다. 과학자에 대해 관심이 많고 과학자를 우대해야 좋은 과학자가 많이 나온다.
유럽을 포함한 과학 선진국은 진작부터 과학자를 우대했다. 유로화를 사용하기 전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지폐 107종 중 26종(24%)에 과학자의 얼굴이 나왔다. 2004년도에는 일본이 1000엔권 지폐에 과학자 노구치 히데오(野口英世)의 얼굴을 넣었다. 우리는 국제교역 규모가 4000억 달러를 넘어서는 세계 12위의 경제대국이면서 OECD 국가 중 화폐에 과학자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는다. 과학자를 박대하는 풍조가 계속되면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고액권 화폐에 넣을 인물 선정에도 적절한 시기가 필요하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독립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많은 분의 역할이 중요했지만 미래 지향적으로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이끌어 갈 주인공에 주목해야 한다. 국가경제의 총생산은 과학자의 기술혁신과 과학의 발전으로 증가한다. 경제인과 정치인이 이런 발전의 결과물을 잘 관리해야 한다.
한국을 발전시킬 과학자들이 경제위기의 시대에 어려움을 맞고 있으므로 모든 국민이 격려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고액권인 10만 원권을 반드시 발행하고 여기에 들어갈 인물과 도안을 다시 선정하기 바란다. 대상 인물로는 세종 때 천출에서 종삼품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오른 입지전적인 조선시대 과학자 장영실을 꼽을 수 있다. 위기의 시대, 변화의 시대에 과학자가 선도의 주역이 되도록 국민의 성원과 정부의 배려가 있어야 하겠다.
정태섭 연세대 의대 교수 영동세브란스병원 영상의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