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오늘은 첫 모임인 만큼 ‘스티머스의 탄생’에 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건번호 35’가 종결되기 1년 전, 2048년 1월 9일, 은석범 검사는 24개월 동안 실시한 프로젝트 결과를 보안청 수뇌부에 보고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습니다. 파트너인 단발머리 남앨리스 형사 역시 초조한 듯 손톱을 깨물었지요. 석범은 관련 자료를 최종 점검하다가, 연구노트 속지에서 프로젝트 첫날 끼적인 메모를 발견했답니다.
기억은 내 몸의 세포를 바꾼다.
기억은 마음에 남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다. 경험은 세포의 화학적 성질을 변화시키고 세포 사이 연결 방식을 송두리째 바꿔 새롭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세포의 변화가 곧 ‘기억’이다. 경험이 끔찍할수록 세포들은 미세한 것까지 다 기억한다.
빠르게 돌아가는 석범의 검은 눈동자엔 긴장감이 서렸지요. 수십 번도 넘게 연습한 도입부를 다시 외웠습니다.
“특별시립 뇌박물관 학예팀과 함께 개발한 ‘단기기억 재생장치’ 스티머스(STEMERS·Short-term Memory Retrieval System)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미사여구는 생략하고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 보안청의 보고 방식입니다. 첫 문장만 순조롭게 풀리면 다음은 어떻게든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실수하지 말아야지.’
오전 10시, 보안청 간부 여섯 명이 정례 회의를 마치고 한꺼번에 11층 세미나실 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시작하지.”
84세인 부장검사가 의자에 천천히 앉으며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2048년 당시 특별시민의 평균 수명은 130세고 검사의 정년은 85세였습니다. 노인연금은 90세부터 나왔죠. 세미나실로 들어온 간부들의 평균 연령도 70세를 훌쩍 넘겼습니다.
“저희 연구팀이 이번에 개발한 단기기억 재생장치 스티머스는 간편하진 않습니다.”
이런! 간편하지 않다고?
피해자의 뇌를 24시간 안에 절편하고 영양분 시럼(serum·장액)을 계속 주입해 세포 수축을 막는 과정이 번거롭긴 해도, ‘간편하진 않습니다’는 스티머스에게 어울리는 표현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 하지만 스티머스는 특별시 보안청의 과학수사에 새로운 교두보를 마련할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간부들은 원두커피를 따르고 과자를 집어먹으면서, 긴장감 없는 눈빛으로 자료파일을 뒤적였습니다. 실패가 예정된 프로젝트였으니까요.
“스티머스는 피해자의 전전두엽에서 가장 최근 주입된 기억을 추출하여 영상으로 재생하는 장치입니다. 이 장치의 원리를 말씀드리기 전에 먼저 간단한 동영상 한 편을 보시죠.”
낡고 투박한 동영상의 주인공은 원숭이입니다. 이름은 피터고요. 이 실험을 고안한 예일대 신경과학과 패트리샤 골드만 라킥 교수는 대학 시절 인상 깊게 본 연극에서 따온 ‘피터’라는 이름을 자신의 오랜 실험 파트너에게 붙인 겁니다.
별명은 소림사 스님이죠. 실험을 위해 머리 부분의 털을 완전히 깎았거든요.
두 개의 전극을 두개골 앞부분에 꽂은 피터가 의자에 얌전히 앉았습니다. 배가 고팠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사지를 흔들지는 않았습니다. 벌써 2년 반째 라킥의 실험에 참여하는 중이니까요.
피터는 자기 앞에 놓인 하얀 스크린 중앙의 빨간 십자(+) 표시를 응시했습니다.
피터의 등 뒤에는 따로 라킥 교수를 위한 실험장비들이 놓여 있었죠. 원숭이 전전두엽(Prefrontal cortex)에 꽂은 전극이 측정하는 신경세포의 활동은 초록색 오실로스코프(Oscilloscope·전기현상의 파형을 눈으로 관찰하는 장치) 영상으로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5초쯤 지났을까요.
오른쪽 45도 각도에서 파란점(O) 하나가 등장했다가 곧 사라졌습니다. 그 순간 신경세포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피터의 뇌가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피터는 파란 점으로 눈을 돌리진 않고 여전히 빨간 십자 표시만 응시하였습니다.
10초가 더 지났을까요.
빨간 십자 표시가 사라지자, 피터는 비로소 파란 점이 등장했던 지점으로 눈동자를 옮겼습니다. 10초 동안 원숭이는 가운데 빨간 십자 표시를 응시하였지만, 십자 표시가 사라지자마자 파란 점이 나타났던 방향으로 눈동자를 옮기려고 궁리했던 겁니다. 원숭이가 파란 점을 바라보기 직전까지는 전전두엽의 세포들이 심하게 요동쳤지만, 정작 눈동자를 옮기고 나서는 움직임이 사라졌습니다. 기억을 하는 동안에만 신경세포 활동이 증가하는 것을 감안한다면, 전전두엽 신경세포들은 단기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Prefrontal cortex의 뉴런은 단기기억을 하는 동안 1초에 수십 개의 스파이크들을 내보냅니다. 이런 지속적인 스파이크 발생이 뇌 속에서 단기기억을 표상한다는 사실을 라킥 교수가 처음 발견한 거죠. 반백 년 전 그러니까 1990년대 일입니다.”
“Prefrontal cortex가 전전두엽이라고 했나?”
부장검사는 복잡한 의학 용어가 익숙하지 않은 듯 물었습니다.
“아, 네 죄송합니다. 전전두엽… 맞습니다. 전전두엽의 세포 활동을 분석하면 단기기억을 알 수 있습니다. 살해된 이들에게 가장 최근 기억이란 죽기 직전의 경험이겠지요. 그 기억을 면밀히 살피면 범인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건 살아 있을 때 얘기고. 단기기억이 뇌세포의 전기적 활동이라는 형태로 저장된다고 하지 않았나? 죽은 자의 뇌에선 그 활동을 측정할 수 없을 테니 오히려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해야 할 것 같은데?”
석범은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망설임 없이 답했습니다.
“2018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소재)의 유밍 푸 교수와 그의 동료들이 했던 실험은 페트리디시(Petridish·실험접시) 위의 뇌세포 절편도 단기기억을 저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단기기억이 신경세포들의 구조적 성질도 바꾼단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저희 연구팀이 주목한 현상이 바로 그겁니다. 일상에서 어떤 일을 잠시 기억했다가 잊더라도, 여러 번 반복되면 그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가기도 하거든요. 부장님이 공만호 검사의 세 살배기 딸 현지의 이름을 열 번쯤 묻고 나서 이제는 기억하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반복된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넘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기억해내지 못하는 단기기억들도 전전두엽에 어떤 형태로든 저장되어 있다는 얘기군.”
“네, 그렇습니다. 푸 교수는 우리가 단기기억을 하고 있는 동안, 스파이크를 계속 생성하기 위해, 전전두엽 뉴런들의 세포막에 이온채널이 순식간에 늘고 시냅스 사이에 정상세포 간의 신호전달을 유도하는 글루탐산 수용체(NMDA)들이 증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푸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뇌절편 실험’에서 확인했지요. 전전두엽 세포들의 시냅스 연결 강도 분포와 세포막의 성질 변화를 매 순간 매핑하면 죽은 자의 뇌에서도 가장 최근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영상으로 재생하려면 전전두엽에 인출 신호를 넣어주면 됩니다. 흥미롭게도 푸 교수는 기억할 자극의 강도가 강할수록 세포 변화가 현저히 커진다고 논문에 적었습니다.”
“살인자의 공격만큼 강한 자극도 없겠지.”
복잡하고 어려워 귀찮다는 표정을 내내 짓던 간부가 끼어들었습니다.
“긴 말 말고, 재생한 영상이나 보죠!”
석범도 사례 발표로 방향을 바꿨습니다.
“이것은 3일 전 서울특별시 신림 15동에서 살해된 남성 피해자 진용한의 전전두엽에 담긴 단기기억을 인출한 영상입니다.”
어둡고 싸늘한 뒷골목이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 머리를 맞대듯 둥글게 서서 내려다본다. 갑자기 발길질이 쏟아진다. 잠시 암전되었다가, 살짝 눈이 떠지듯 영상이 다시 나타난다. 이마에서 왼눈을 거쳐 뺨까지 사선으로 칼자국이 심하게 난 사내가 재킷 안주머니를 뒤지는 중이다. 지갑을 꺼내 들고 투욱툭 가볍게 두 번 던졌다가 받는다.
“생큐! 좋은 데 쓸게. 잘 가.”
사내가 바지 뒷주머니에서 단검을 뽑아 높이 든다. 검이 폭포처럼 떨어진다. 순식간에 어둠이다.
석범은 영상을 되돌려 칼자국 흉터를 중심으로 얼굴을 클로즈업했습니다. 이 살인자는 특별시연합수배자 명단에 6년째 이름을 올린 난도질파 행동대장 강철상입니다. 2년 전 런던특별시 연쇄강도 용의자로 지목된 뒤 행적이 묘연했는데, 서울특별시로 몰래 숨어든 겁니다.
부장검사가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습니다.
“강철상! 저 새끼 잡아와. 그리고 이거, 스티머스? 내일부터 사건에 바로 투입해. 아니지. 아예 특별수사대 아래 팀을 하나 만들어봐. 대뇌수사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