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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1-12 02:58:00


인간만이 번식과 무관하게 사랑을 즐긴다고 확신하던 어리석은 시절이 있었다.

피그미침팬지인 보노보(Bonobo)가 이 가설을 깼다. 두 무리가 영역다툼을 벌이기 직전, 이쪽 암컷 보노보가 저쪽 수컷 보노보와 사랑을 나눔으로써 갑작스러운 평화가 찾아든 것이다. 인간‘만’이 가능하다는 많은 일들이 소란스럽게 제시되었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대뇌수사팀은 ‘사건번호 35’를 끝내고 스티머스로 살인사건을 두 건 더 해결했다.

극초음속 비행기 화장실로 뛰어들었던 여형사 남앨리스는 손목 인대를 다쳤다. 보안청 특별수사대장 도준평 차장검사는 배려 차원에서 로봇 채널 개국 축하쇼 경호를 두 사람에게 맡겼다.

살인범 검거에 비하자면 축하쇼 경호는 달콤한 휴식이었다. 행사장 입구에 서서 초청 인사의 신원을 확인했다.

“보노보 보노보 보노보 보노보!”

석범은 첫 음이 강하고 끝 음을 약하게 두 번 읊었다가 첫 음이 약하고 끝 음을 강하게 두 번 되뇌었다. 란 채널 이름이 의미심장했다. 보노보가 무너뜨린 인간다움의 근거를 로봇이 이어가겠다는 선언이리라.

보안청에서 석범은 ‘음유시인’으로 통했다.

마야콥스키, 네루다, 이백 등 술술 외우는 시가 수백 편에 달하기도 했지만, 궁리궁리하는 고민거리를 운율에 실어 혼잣말로 읊어댄 탓이다. 곁에서 단어 몇 개만 주워들어도 최근 관심사가 드러났다. 스티머스 제작 과정에서도 단기기억 인출장치에 근사한 이름을 짓기 위해 온갖 단어들을 찾아 헤맸다. 아쉽게 탈락한 이름 중에는 ‘브레인 비전’과 ‘하늘보다 넓은’도 있었다.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 제럴드 에덜먼의 에세이 『뇌는 하늘보다 넓다』를 읽다가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렸기 때문이다. 특별수사대에서 보고서를 꼼꼼히 따지고 되새겨 아름다움까지 고려하는 유일한 인간이기에, 석범에게 음유시인이란 별명은 더없이 잘 어울렸다.

축하쇼 경호는 보안청 특별수사대 경호로봇팀의 고유 업무다. 로봇 전문채널 설립을 반대하는 자연인 그룹이 축하쇼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겠다고 협박전화를 한 후, 대뇌수사팀으로 경호 업무가 넘어왔다. 자연인 그룹이 시위에서 물 풍선이라도 던진다면 로봇들은 ‘경호로봇 수칙’에 따라 그들을 강력하게 진압할 것이다. 살인 금지 명령을 내리더라도 크고 작은 마찰은 각오해야 한다.

하나,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지 말 것

하나, 시위대를 체포하지 말 것

하나, 초청 인사에게 친절할 것

석범은 와 맺은 경호 협정문을 되짚었다. 잔칫상에 잿밥 뿌리지 않도록 막기만 하라는 뜻이다.

2030년을 ‘1인 미디어-홀로 만들고 천하가 만끽하라’의 원년으로 삼고 나서도 19년이 더 지났다.

1인 미디어에 관한 규제가 2030년 1월 1일을 기해 태양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수많은 1인 미디어가 관련 뉴스를 쏟아냈다.

“몇 번을 말씀드려야 아시겠습니까? 이 기계 팔은 미등록입니다.”

단발머리 앨리스가 은색 드레스를 멋지게 차려 입은 여인을 제지했다. 매니저가 눈을 부라렸다.

“아이, 왜 이러세요? 드라마 도 못 보셨어요? 그 드라마 주인공 서령이잖아요? 이보다 더 확실한 신원증명이 어디 있습니까? 초청장도 제시했잖아요?”

앨리스가 별 모양 초청장을 흔들었다.

“이 초청장은 진품입니다. 저도 드라마 은 한 회도 빼놓지 않고 다 봤습니다. 진짜예요! 얼굴이나 체형만으론 신원 확인이 어렵습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지 잘 아시잖아요? 손목 혈관 인식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기계 팔의 등록상황을 체크해야 합니다.”

여배우가 가늘고 고운 두 팔을 치켜들었다.

“이게 얼마짜리인 줄 알아? 세계에서 딱 한 벌밖에 없는 명품 중의 명품이야. 내가 이걸 구입했다는 기사가 미디오스피어(1인 미디어들의 집합체)를 도배했는데 모른단 말이야?”

“가격 따윈 관심 없습니다. 신체에 이식하는 인공 장기는 ‘등록 후 사용’이 필수요건인 건 아시죠? 그 두 팔은 미등록입니다. 인공 장기에 붙는 공공세를 내지 않으려고 등록을 미룬 건 아닌가요? 그리고…….”

앨리스가 말을 멈추고 끝이 반짝이는 검색봉을 들어올렸다.

“B3나노튜브 홍채 역시 미등록이군요.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