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보증기금과 기술보증기금의 통폐합은 아마도 성사되기 힘들 것이다. 금융 공기업 개혁의 상징처럼 돼 있지만 돌아가는 모양새는 통합과 거리가 멀다. 무엇보다 두 기관은 신용경색으로 어려움을 겪는 중소기업들의 자금난을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중소기업 보증한도를 2배 가까이 늘렸고 보증절차를 하나라도 더 줄여주려고 전력을 다한다. 이들의 노력을 ‘조직 수호용 이벤트’ 정도로 폄훼하고 싶은 뜻은 없다. 하지만 금융당국인들 정부 시책에 부응하겠다며 고군분투하는 공기업에 쉽사리 칼을 댈 수 있을까.
한국토지공사와 대한주택공사의 통폐합도 비슷한 경로를 밟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은 “다른 건 몰라도 10년 넘게 끌어온 토공과 주공 통폐합은 이번에 반드시 해낸다. 믿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기 부양을 위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를 늘리다 보면 토공과 주공을 동원할 일이 많을 것이다. 당장 토공은 “미분양 적체로 고생하는 건설업체를 돕겠다”며 노는 땅을 사주는 사업에 팔을 걷어붙였다. 토공과 주공, 신보와 기보의 사장(또는 이사장)을 따로 임명했을 때 통폐합 구도는 헝클어졌다고 봐야 한다.
돌이켜 보면 이명박 정부에 주어진 공기업 개혁 기간은 집권 후 6개월이었다. 개혁을 할 요량이라면 늦어도 지난해 8월 말까지는 통폐합 및 민영화의 대상과 방식, 추진 시나리오를 확정했어야 했다. 시간을 아껴 써도 모자랄 판에 정부는 프로젝트 제목을 공기업 개혁에서 선진화로 바꾸는 비(非)본질적인 일로 허송했다. 그러는 사이에 터진 미국발(發) 금융위기는 개혁의 동력을 소진시켰다. 공기업 개혁이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된 것은 속도전에서 졌기 때문이다.
비슷한 현상이 1년의 시차를 두고 재연되고 있다. 대상이 공기업에서 조선 및 건설업종의 민간기업으로, 주체가 관(官)에서 민관(民官) 합동으로 바뀌었을 뿐 구호만 요란하고 실속이 빈약한 것은 닮은꼴이다. 부실기업 솎아내기는 우리 경제가 글로벌 경제위기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문제다. 공기업 개혁이 실패하면 불편해도 비효율을 안고 가면 그만이지만 부실기업과 우량기업의 옥석(玉石)을 제때 가려내지 못하면 금융시스템에 걸린 과부하로 경제 전체가 위기에 빠진다.
채권 은행은 해당 기업의 속사정을 누구보다 잘 안다. 기업 퇴출 상황을 가정해 시뮬레이션도 여러 차례 했다고 한다. 실무진 사이에서는 “마음만 먹으면 내일이라도 대상을 선정할 수 있다”는 말도 들린다. 소나기가 지나갈 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보자는 발상이 엄청난 재앙을 부른다.
속도전에서 패해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 수순은 발언권 약한 기업들이 대(對)국민 브리핑용 숫자 채우기에 동원되는 상황이다. 공기업 개혁이 표류하는 동안 한국전력 발전자회사와 코레일 같은 핵심 기업은 민영화 리스트에서 슬그머니 빠졌다. 사실은 민간회사인데도 공적자금이 투입됐다는 이유로 공기업의 외투를 쓴 기업들이 그 자리를 메웠다. 채권단이 로비에 강하고 버티기에 능한 유력 기업을 비켜가다 보면 힘없는 중소기업만 퇴출 대상이 된다.
기획재정부는 오늘 ‘5차 공공기관 선진화 추진계획’을 발표하지만 공기업 경영진조차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8일 출범한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회는 적절한 반면교사를 아주 가까운 곳에 두고 있다.
박원재 경제부장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