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잃어버렸던 자신을 마주하게 한다. 생전 처음 와본 곳이지만 문득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김영하 작가는 ‘그럴 때 여행은 낯선 곳으로 떠나는 갈 데 모를 방랑이 아니라 어두운 병 속에 가라앉아 있는 과거의 빛나는 편린들과 마주하는, 고고학적 탐사, 내면으로의 항해가 된다’고 말한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김영하 지음/293쪽·1만2000원·랜덤하우스
소설가 김영하 씨, 내밀한 고백-성찰 담은 시칠리아 여행기 펴내
소설가 김영하 씨가 40년간의 정착생활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을 때 그는 주변의 많은 것을 정리해야 했다. 국립예술대학 교수직에 사표를 썼다. 공무원연금과 건강보험, 월급은 자동소멸됐다. 진행하고 있던 라디오 프로그램도 관뒀다. 막바지에 이르러선 집과 넘치는 소장품들을 정리하고 각종 약정으로 얽힌 자질구레한 계약을 끊어내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런 뒤 아내와 이탈리아의 시칠리아로 훌쩍 떠났다.
이 책은 작가가 1년간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로 가기 두 달 반 전 시칠리아의 이곳저곳을 다닌 여행기다. 여행은 그의 서울생활 정리 작업에서부터 출발한다. 떠나야 할 때 정리해야 하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정착생활에서 누리고 있던 특혜가 많았음에 틀림없다.
그는 어느새 ‘나이 마흔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돼 있었다. 주요 문학상을 두루 수상했고 신작을 낼 때마다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았다. 국립대학 교수이자 방송진행자이기도 했고 작품들은 해외에 수출되거나 연극 또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는 그 시절이 ‘실로 숨 막히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뒤통수 어딘가에 플라스틱 빨대가 꽂힌 기분’으로 허둥지둥 살아야 했다. 아파트와 차, 안정된 생활에 안주했던 그는 자신이 ‘그토록 한심해하던 중년의 사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락한 일상을 처분해 버린 그는 아내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이탈리아 반도 서남쪽 끝, 눈부신 지중해로 둘러싸인 시칠리아에 도착한다. 이곳에서의 삶은 무계획적이며 단순하고 평화롭다. 리파리, 타오르미나, 노토 등으로 도시를 옮겨 이동하지만 생활 패턴은 비슷하다. 테라스에서 글을 쓰고, 맛있는 빵과 커피, 과일로 아침을 때운다. 오징어, 홍합을 넣은 스파게티로 점심을 먹고 햇볕이 뜨겁게 드리워 거리가 한산해질 때면 꾸벅꾸벅 존다. 저녁에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밤에는 일찍 잠에 든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지나간다.
그는 시칠리아 도시들의 그리스 식 원형극장 앞에서 20년 전 목 터져라 응원가를 불러댔던 대학의 노천극장을 떠올리거나 거대한 지각변동이 만들어 낸 화산도와 해협의 장대한 풍경에 경외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잊혀졌던 감각을 일깨워간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가운데서 내면 깊숙한 곳에 침잠한 자신과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이탈리아 말을 모른다고 한 작가 앞에서 계속 말을 걸어오는 이들, 금세 정이 들어 눈물을 글썽였던 이들, 관광객을 상대로 살아야 하는 이들이 흥정을 앞두고 보이던 초조하고 절박한 눈빛도 작가한테는 소설의 질료인 듯 선명히 재현된다.
신화와 전설이 어린 신전과 유적지들, 골목마다 풍기던 토마토 냄새, 작살처럼 내리꽂히는 지중해의 햇살을 품에 안고 시칠리아를 떠나는 페리의 뱃머리에 선 그는 ‘시칠리아 여행에서 나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내 안의 어린 예술가, 야성과 천연의 감각, 그리고 나 자신…, 즉 잃어버린 모든 것은 서울에 있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작가의 감수성 넘치는 사유와 지중해 섬의 이국적 풍경이 어우러진 글과 사진은 책을 읽는 내내 ‘떠남’을 충동질한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