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이분법으론 도태”… 美-유럽 ‘통합의 이념’도 진화중
英佛 좌-우정당, 정책-인물 융합 실용적 노선 뚜렷
美, 오바마 당선으로 좌파의 ‘신애국주의’ 변이 등장
국내서도 보수-진보진영 “세계화 해법 공유” 목소리
찰스 다윈의 진화론은 역사적으로 좌우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대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이론이다. 19세기 이후 우파와 좌파는 진화론을 각각 다르게 해석해왔다.
다윈의 진화론을 선점한 진영은 우파. 영국 사회학자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유기체론의 시각에서 내놓은 ‘사회진화론(Social Darwinism)’은 환경 적응에 유리한 부분을 보존한 개체가 살아남는다는 다윈의 ‘자연선택’을 적용해 사회도 적자생존의 원리가 지배한다고 설명했다.
우파는 사회진화론이 인종차별주의와 제국주의를 정당화한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적자생존을 자유방임을 옹호하는 시장경제와 자본주의의 근간으로 삼아왔다.
미국 옥시덴털칼리지 등에서 진화론을 가르쳐온 ‘왜 다윈이 중요한가’의 저자 마이클 셔머 씨는 “개체들의 경쟁이 의도하지 않게 복잡한 설계와 생태 균형을 이루는 과정을 보여준 다윈의 ‘자연선택’과, 개인들의 경쟁이 의도하지 않게 국가의 부와 사회적 조화를 이끌어 내는 것을 보여준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확히 대응한다”고 말했다.
좌파는 다윈식 진화를 ‘바람직한 방향의 진보’로 해석해 인간 본성과 역사도 자연처럼 진화하면서 공산주의 사회와 새로운 인간형이 도래할 것이라고 봤다. 이 주장은 1990년대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으로 실패작으로 드러났지만 최근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더불어 미국과 유럽 등에서 새로운 ‘변이’를 탄생시키고 있다.
○ 영국식 이념 변이 ‘버츠켈리즘’의 세대 유전
사회주의의 도태를 목격한 프랜시스 후쿠야마(정치학) 미국 존스홉킨스대 교수는 1992년 “단순히 냉전의 종말이 아니라 인류의 이데올로기적 진화의 마침표”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의 몰락은 이념 진화의 끝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국가와 시장, 성장과 분배, 자유와 평등 같은 가치를 둘러싼 좌우 이념의 생존 경쟁이 계속됐다. 주목할 점은 최근의 이념 진화가 특정 이념의 도태나 생존이 아니라 이념의 간극을 좁히는 ‘통합의 변이(變異)’의 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수와 진보의 근원지인 영국에서 나타난 이념의 진화는 변이가 적자로 생존해 그 형질과 특징이 다음 세대로 유전되는 다윈의 진화론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노동당이 총선에서 승리했다. 전쟁 이전의 빈곤과 불평등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는 영국인들이 국유화와 분배 정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1951년 재집권한 보수당은 실업 감소와 복지 정책에서 노동당의 기조를 유지했는데 이는 1970년대까지 계속됐다.
이런 현상은 자본주의 원칙을 유지하되 분배 정책에 국가가 개입하는 영국식 이념 변이인 ‘버츠켈리즘’으로 해석된다. 버츠켈리즘은 1950년대 각각 보수당과 노동당 소속으로 재무장관을 지낸 리처드 버틀러와 휴 게이츠켈의 이름을 따서 붙인 말이다.
버츠켈리즘은 이후에도 이어져 1970년대 오일 쇼크와 경제 불황 뒤 등장한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우파 정책을 강화했음에도 1997년 집권한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은 이 정책을 뒤엎지 않았다. 블레어는 자유주의 경제 정책과 강력한 정부를 혼합시켜 또 다른 ‘버츠켈리즘’(제3의 길)을 탄생시켰다.
‘보수와 진보-이념을 넘어선 영국의 현실 정치’를 펴낸 김상수(영국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이념보다 통치의 효율성을 강조하는 실용적 노선이 ‘합의의 시대’를 가능하게 했다”고 말했다.
○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출현한 이념 변이
최근 미국에서는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좌파의 ‘신(新)애국주의’라는 이념 변이가 출현했다.
6일 인터내셔널헤럴드트리뷴에 따르면 오바마의 당선이 확정된 지난해 11월 4일 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 모인 수백 명은 가로등에 성조기를 걸고 국가를 불렀다. 제러미 배론(역사학) 미국 드루대 교수는 “미국 좌파가 그동안 경시했던 헌법, 정당한 절차, 권력 분립이 얼마나 중요한지 인식하면서 좌파의 신애국주의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좌우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통합의 변이’는 유럽 곳곳에서도 확산되고 있다. 2007년 프랑스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은 좌파 석학인 자크 아탈리 씨를 수장으로 하는 ‘아탈리 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국경 없는 의사회’의 창설자인 사회당 출신의 베르나르 쿠슈네르 씨를 외교장관에, 빈민운동가인 마르탱 이르슈 씨를 사회복지비서관에 임명했다.
2006년 스웨덴 총선에서 중도우파연합이 승리하며 좌파연합의 65년 장기 집권을 끝낸 것도 단순히 우파 생존, 좌파 도태가 아니라 좌우 이념의 접점을 찾은 변이의 결과였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지난해 1월 프랑스 우파 정당 대중운동연합(UMP)의 대의원 대회장에 참석해 “과거의 낡은 유럽식 좌우 정당 해법으로는 세계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말했다.
○ 한국의 이념 변이 실험, 적자생존 할까
치열한 이념 대립으로 의회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한국에서도 유사한 통합 변이의 실험이 시도되고 있다.
지난 정권에서 좌파와 대립했던 뉴라이트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좌우 이념의 대화를 통한 국민통합’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안병직 시대정신 이사장은 “새로운 보수는 정치, 경제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분명히 하되 이념적으로 자유민주주의와 사회민주주의가 다 허용되는 사회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좌파에서는 대한민국의 국가적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는 변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2006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기고한 글에서 “진보 진영에 대한민국의 국가적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흑백 논리가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에는 “대한민국을 긍정하는 새로운 좌파가 돼야 한다”(주대환 전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호기(정치사회학) 연세대 교수는 “갈 길이 멀지만 진화론적 시각에서 한국의 이념은 좌우가 세계화와 선진화라는 환경에 적응해 서로 해법을 공유할 수 있는 구도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김일영(한국정치사) 성균관대 교수는 “지금은 잡종 강세의 시대”라며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 좌우 이념을 어떤 비율로 어떻게 버무릴 것인지가 이념 체계 진화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