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다음의 ‘미네르바 글 모음’을 읽어 보면 그의 섣부른 예측은 운 좋게 들어맞은 것보다 틀린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누리꾼들은 내용의 정확성이나 전문성보다는 거침없는 직설(直說) 독설 그리고 욕설에 매료됐던 것 같다. 그가 미디어의 인터뷰 요청을 거부하며 검찰에 붙잡히기까지 익명 속에 계속 숨어 지낸 것은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 허상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것임을 스스로 잘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네르바 현상은 전문가와 학자들의 침묵에도 책임이 있다. 권위 있는 경제전문가와 학자들이 경제현안을 분석하고 진단하는 글을 미디어에 수시로 올렸더라면 미네르바 같은 거짓 예언자가 발붙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프린스턴대 폴 크루그먼 교수는 뉴욕타임스에 1주일에 두 차례 칼럼을 쓴다. 뉴욕타임스의 사내(社內) 칼럼니스트와 같은 빈도다. 그리고 뜨거운 경제현안에 대한 진단을 거의 매일 블로그(krugman.blogs.nytimes.com)에 올린다. 짧은 글이긴 하지만 하루에 세 편 올릴 때도 있다.
전문가 침묵 ‘거짓 예언자’ 키웠다
미네르바는 포털 다음의 ‘아고라’를 무대로 활약했다. 촛불시위 때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광고주들에 대한 협박의 진원도 아고라다. 고대 그리스에서 아고라는 공개된 토론 광장을 의미했는데, 한국의 인터넷 아고라는 언론 자유를 억압하고 비과학적 괴담을 유포하는 근거지가 돼버렸다.
누리꾼들은 인터넷에서 정보 검색을 하고, 리포트를 쓰고, 댓글을 올리고, e메일을 교환한다. 그러나 텍스트의 시의성 정확성 적절성을 따지고, 의견과 사실을 구분하고, 사이트의 신뢰도를 파악하는 비판적 분석 능력(critical literacy)을 갖추지 못하면 미네르바 같은 가짜에 속아 넘어가기 쉽다.
작년에 촛불 소녀들도 인터넷에 떠도는 비과학적인 선동에 홀려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미국산 쇠고기를 ‘광우병 독극물’이라고 성토하며 누리꾼을 선동했던 세력은 촛불이 꺼지자 광우병의 진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흥미를 잃은 모양이다.
피카소(인터넷 ID)는 포스텍의 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개업의사다. 전공분야는 뇌질환 및 신경계, 근골격계 질환. 피카소는 촛불시위가 뜨거워지자 국내외 학계의 최신 성과물인 200여 편 이상의 논문과 영국 정부가 2000년에 발행한 5000쪽 분량의 ‘광우병 백서’를 바탕으로 브릭에 글을 계속 올렸다. 황우석 씨의 줄기세포가 처녀생식일 가능성을 제기한 것도 그였다.
그가 이번에 브릭에 쓴 글을 토대로 ‘과학이 광우병을 말하다’(지안출판사)라는 책을 펴냈다. 이 책의 결론은 △광우병은 영국(미국이 아님)이라는 나라와 특별한 관련이 있고 △발생경로가 규명돼 사료를 통제하면서 광우병 소가 급격히 감소하고, 인간 광우병 환자가 거의 나오지 않고 있으며 △예방조치가 중요하지만 걸릴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에 위험성을 부풀려선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가명(유수민)으로 책을 내고 학력 경력도 숨겼다. 출판사를 통해 연락이 닿은 그는 매우 조심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는 “책을 팔아 벌 돈은 조금밖에 되지 않을 텐데, 신원이 드러나면 병원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라고 말했다. 미네르바 영장 판사와 메이저 신문 광고주들이 당한 사이버 공격을 생각해 보면 그의 우려도 이해할 만하다.
윤평중(철학) 한신대 교수는 계간 ‘철학과 현실’ 2008년 겨울호에서 “촛불의 대대적 확산을 가져온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자 귀환점은 ‘독극물 비슷하게 여겨진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분노였다”고 분석했다. 그는 피카소의 책을 근거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성은 왜곡과 과장의 혐의를 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부풀려졌고 오도됐다”고 단언했다. 생명과학의 문제를 흥미롭게 다룬 피카소의 책은 고작 2500부 팔렸다. 촛불을 들고 아고라를 메우고, 미네르바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신념(또는 편견)에 배치되는 진실엔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과학적 진실 외면하는 편견
대중의 미몽(迷夢)을 깨우쳐야 할 책무가 있는 전문가와 학자, 저널리스트들 가운데 일부는 미네르바 현상을 부추겼다. 대다수는 미네르바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침묵했다. 촛불 소녀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하며 미화하는 미디어들도 있다.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이 추구해야 할 최고 가치는 정확한 사실이요, 과학적 진실일 것이다.
황호택 수석논설위원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