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을 향한 2년 여정의 마지막 기착지는 광장이었다.
17일 오후 3시경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인을 태운 ‘취임열차’가 워싱턴에 앞서 볼티모어에 도착하자 인근 광장을 메운 4만 인파의 환성은 절정에 달했다. 영하 13도의 한파에도 불구하고 오전 4시 반경부터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오바마 당선인의 열차 여행은 사표(師表)로 삼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1861년 취임열차를 본뜬 것이다. 사실 링컨을 벤치마킹한 지도자는 한둘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한때 링컨 리더십을 연구했다. 링컨을 비롯한 전시(戰時) 지도자의 고독한 결정을 주제로 한 ‘최고사령부’는 그가 가장 애독한 책이었다.
하지만 ‘광장에 선 오바마’와 대조적으로 떠오르는 부시의 이미지는 ‘닫힌 공간’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의 담장이 배경 그림으로 떠오른다.
지난주 동아일보가 취재한 관타나모 수용소는 폐쇄적 리더십의 유물이다. 그곳에서 자행된 가혹심문의 이론적 토대는 사실 한국계 이민자의 ‘작품’이다. 네오콘이 득세하던 시절인 2002년 보수파 법률학자인 법무부 존 유 부차관보는 가혹심문, 영장 없는 도청을 정당화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지금 시점에 가혹심문 기법이나 영장 없는 도청을 비판하는 건 쉽다.
하지만 9·11테러의 파문이 한창이던 시절, “국가안보의 절실함을 감안해 법치주의가 요구하는 엄격한 절차와 투명성을 일부 보류해야 한다”는 논리가 지녔을 흡인력을 생각하면 섬뜩한 생각이 든다. 영장주의, 묵비권, 접견권 등의 ‘성가신 민주주의’를 팽개치고 싶은 유혹이 얼마나 강했을까.
통치는 담장 위를 위태롭게 걸어가는 일이라고들 한다. 균형을 잃으면 좌편향이나 우편향으로 빠진다. 부시 대통령이 바로 그랬다. 대(對)테러 대책의 효율성만을 앞세운 정교한 논리에 설복된 그는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우편향에 빠져 버렸다.
한국 사회도 한때 열린 광장 대신 좌편향의 닫힌 시각을 고집하는 정권들을 겪었다. 모든 걸 자신들만의 이념적 프리즘으로 보려 했고, 미국에 대해선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당시 워싱턴의 한 외교전문가는 “‘오지사고(奧地思考)’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고 안타까워했다.
세계사는 열린사회, 관용과 통합의 사회가 융성했음을 보여준다. 기회의 나라, 용광로 사회로 불리며 융성했던 미국은 21세기 벽두 8년간 폐쇄적 리더십을 경험했다.
새 선장이 될 오바마는 ‘광장의 아들’이다. 열린 마음과 관용의 산물이다.
케냐에서 염소를 몰면서도 열린 세상에서 새 문물을 배워보고 싶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던 청년이 없었더라면, 흑백 간 연애가 터부였던 1960년대 초 케냐 출신 유학생을 인종적 편견 없이 연인으로 받아들인 18세 백인 여대생이 없었더라면 흑인 대통령 시대는 가능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 여대생은 홀로 아들을 키울 때 매일 오전 4시면 아들을 깨워 함께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눴다. 인도네시아에 살 땐, 소년 오바마의 회상을 빌리면, 낮에 열린 대문 안으로 숱한 걸인들이 찾아왔다. 아이, 노인, 팔로 걷는 한센인…. 끝없이 손을 벌리는 걸인을 그녀(어머니)는 외면하지 않았다.
광장엔 온갖 인종이 어우러져 있었다. 발을 밟혀도 서로 웃는다. 오바마도 웃었다. 하지만 그도 머잖아 담장 위를 걸으며 어려운 선택을 요구받을 것이다. 담장 양쪽에선 나름의 정교한 논리로 무장한 이념세력들이 바지 자락을 잡아당길 것이다. 지구촌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그가 열린 마음, 광장의 리더십을 잃지 않기를….
이기홍 워싱턴 특파원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