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1월 20일 밤, 덕수궁 함녕전.
저녁 수라(水剌·임금의 식사)를 마친 고종(1852∼1919)은 상궁들과 대화를 나눈 뒤 잠자리에 들었다. 결혼을 앞둔 대한제국(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이 생각났다. 침략국 일본에 볼모로 잡혀가 그곳에서 일본 왕실 출신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는 아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상념에 젖었다.
자정이 넘은 1월 21일 새벽, 창덕궁에 있는 순종에게 급한 전갈이 왔다. ‘고종 황제가 잠자리에 드신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뇌일혈 증세가 나타났고 지금은 매우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순종은 서둘러 덕수궁을 찾아 함녕전으로 들었다. 잠시 후 함녕전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 하루 전까지 건강한 모습이던 고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이었기에 독살설이 나돌았다. 일본 총독부의 사주를 받은 전의(典醫·왕실의 의료를 담당하던 관리)가 홍차에 비소를 넣어 고종에게 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쾌한 물증이 있는 건 아니다.
독살설은 조선 백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들에 의해 무참히 시해당했고,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했다는 이유로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된 데다 독살설까지 흘러나오니 백성들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 분노는 3·1독립운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해 3월 4일 고종은 경기 남양주시 홍릉(洪陵)에 안장됐다. 서울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시신도 이곳으로 옮겨와 하나의 봉분 속에 합장했다.
홍릉에 가면 홍살문에서 침전(寢殿·고종의 신위를 봉안한 곳) 사이에 석물(石物·돌조각)들이 서 있다. 조선 왕릉 가운데 매우 이색적인 모습이다.
문인석 무인석을 비롯해 기린 코끼리 해태 사자 낙타 말 모양의 석물을 두 줄로 도열하듯 배치해 놓았다. 문인석 무인석은 높이가 3.8m로, 조선 왕릉의 문인석 무인석 가운데 가장 크다.
이는 황제로서의 위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고종은 1897년 조선의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자신을 황제라 칭했다. 대한제국은 멸망했지만 그래도 고종의 무덤은 황제의 무덤, 황릉(皇陵)으로서의 위용을 갖춰야 했다.
대한제국을 통해 조선의 재건을 꿈꾸었던 고종. 죽음과 함께 제왕의 꿈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홍릉 곳곳에 남아 있는 셈이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