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님! 정작 펜을 드니 제가 감히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대왕님으로 호칭하겠으니 용서해 주십시오. 대왕님께서는 중국에서 입수한 천문학을 갖고 우리 하늘에서 일어나는 천문현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 얼마나 가슴 아파하셨습니까. “짐도 하늘이 내린 제왕일진대 어떻게 내 나라 하늘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이냐”라고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인자하기로 소문난 대왕님께서 일식을 정확히 예고하지 못한 천문관에게 태형을 내리셨습니다.
대왕님의 고뇌를 천문대장 자리에 있는 제가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왕님, 요즘은 수백 년 뒤에 일어날 일식도 초 단위로 예보할 수 있답니다. 제가 곤장을 맞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 정말 다행입니다. 현대 천문학이 정말 신기하지요?
대왕님은 이순지 등을 시켜 우리 책력 ‘칠정산’도 편찬하셨습니다. 하늘에 관한 일은 중국의 천자만이 관장할 수 있다는 사대주의적 고정관념을 깨신 것이지요. 이를 이어받아 우리 한국천문연구원(천문연)이 월력요항을 발표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대왕님께서 그토록 어렵게 지켜내신 책력을 오늘날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사용할 정도로 후손들은 아둔합니다.
하지만 우리 후손을 기특하게 여겨주셔야 할 이유가 꽤 많습니다. 세계의 수많은 국기 중 유일하게 우주의 원리를 바탕으로 태극기를 만들었고 개천절, 즉 하늘이 열린 날이라는 공휴일까지 가지고 있답니다. 애국가 가사에도 동해의 많은 물이 마르고 백두산의 많은 흙이 닳도록 하느님, 즉 하늘이 돌봐준다고 돼 있습니다. 이 정도면 칭찬해 주실 만하지요?
근정전 옥좌 뒤에는 봉우리가 5개인 산 위에 해와 달이 나란히 그려진 일월오봉도가 있지요. 태음(달), 태양(해), 5행성(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을 상징하는 이 그림은 음양오행, 우주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임금이라는 자리는 우주, 즉 하늘이 내려줬음을 상징하고 있지요. 이 일월오봉도와 함께 대왕님 용안을 1만 원짜리 지폐에 모셨습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뵐 수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대왕님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중국 사신의 방문이었습니다. 장영실이 만든 간의와 같은 천문관측 기구를 보고 시비를 걸어올까 귀찮으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간의를 분해해서 모두 숨겨야 하는 수모를 겪으셨습니다. 대덕특구에 있는 천문연 본원 앞마당에는 간의가 복원돼 있습니다. 저는 가끔 그곳에 올라가 대왕님이 어디 서서 별을 헤아리셨을까 생각합니다.
대왕님, 새해는 천문연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서운관 창립 7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때문은 아니지만 마침 세계의 모든 나라가 새해를 세계 천문의 해로 정했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천체망원경 중 하나가 될 GMT(Giant Magellan Telescope) 건립사업에 새해부터 우리 천문연이 참여하게 됐음을 보고드립니다!
요즘 우리나라는 물론 온 세계의 경제가 나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나라 살림을 쪼개 오히려 기초과학에 투자하는 슬기로운 후손을 칭찬해 주세요. 대왕님, GMT 한 번 보고 싶으시지요? 우주가 팽창한다, 블랙홀이라는 희한한 천체가 있다, 우리 우주인이 나왔다, 우리도 로켓을 쏘아 올린다…. 이런 얘기를 들으시면 대왕님은 정말 좋아하시겠지요.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대왕님이 창제하신 한글의 우수성을 실감합니다. 대왕님, 드릴 말씀은 많지만 오늘은 여기서 펜을 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GMT가 준공되는 10년 뒤에는 대왕님께 전혀 부끄럽지 않은 천문학 선진국이 돼 있을 것입니다. 우주시대를 앞서 나아가는 후손의 모습을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박석재 한국천문연구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