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북미 알래스카 매킨리에 도전하다 조난돼 손가락을 모두 잃은 김홍빈 씨. 중증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에 오른 그는 “손가락을 잃었지만 산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친구”라며 활짝 웃었다. 황인찬 기자
절망서 희망 쓰게한 山, ‘너는 내 운명’
그는 “코트를 벗고 싶다”며 오른팔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 엉겁결에 코트 소매 끝을 잡았더니 몸을 뒤로 젖혀 오른팔을 뺐다. 상체를 이러 저리 흔들더니 능숙하게 왼팔마저 빼냈다.
산악인 김홍빈(45·에코로바 홍보이사) 씨는 손가락이 없다. 이 때문에 상의조차 혼자 벗을 수 없는 신세다.
하지만 그는 이달 초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해발 4897m)에 올랐다. 중증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로 7대륙 최고봉 등정에 성공한 것이다.
21일 만난 그는 겸손했다.
○ 91년 매킨리 도전하다 손가락 잃어
“가장 잘하는 일(산악)에 도전했을 뿐이에요. 제가 장애를 갖고 있어 더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김 씨는 “1997년부터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는 데 12년이 걸렸다”며 “마음속의 큰 짐을 벗은 것 같아 홀가분하다”고 했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에서 나고 자란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하루에 산봉우리 4개를 넘으며 학교를 다녔다. 등하교에만 3시간여가 걸렸다. 하지만 그는 “힘든 줄도 몰랐다. 아마 그때부터 산을 좋아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김 씨가 정식으로 산악계에 입문한 것은 1983년 광주 송원대 산악부에 들면서부터. 암벽과 빙벽을 오르며 산이 좋아졌고 산에서 만난 선후배들이 좋았다.
1989년 에베레스트에 처음 오른 그는 설산(雪山)의 매력에 빠졌다. 히말라야 8000m 이상 14좌에 오르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은 그 무렵이었다.
하지만 1991년 큰 시련이 닥쳤다.
홀로 북미 알래스카의 매킨리(6194m)에 도전하다 조난된 지 16시간 만에 구조됐지만 탈진과 고소증으로 의식을 잃었다. 그 때문에 양손에는 심한 동상이 걸렸다.
손가락은 검게 변해갔다. 7차례 수술 끝에 양쪽 손가락 모두를 잘라냈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였다.
손가락을 잃었지만 그는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할 뿐이었다”고 말했다.
○ 3월엔 8091m 안나푸르나 갑니다
하지만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달라진 몸 때문에 당혹스러워했다.
“손가락이 없으니 혼자 양말도 신지 못했어요. 남이 문을 열어줘야 밖에 나갈 수 있어 며칠씩 집에만 머물기도 했죠. 나 혼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어요.”
그러나 그에게는 산이 있었다. 선후배 산악인들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산은 그에게 절망에서 벗어나도록 인도했다.
“산은 내 인생의 전부예요. 그곳에서 절망과 희망을 배웠죠. 산에서 손가락을 잃었지만 한순간도 산을 원망한 적은 없습니다.”
3월 안나푸르나(8091m)에 도전한다는 그는 오른팔을 들고 힘차게 파이팅을 외쳤다.
동그란 그의 손이 이 세상 누구도 풀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주먹처럼 느껴졌다.
▽김홍빈은 누구? △1964년 10월 17일 생 △1985년 광주 송원대 졸업, 1990년 광주대 졸업 △1989년 에베레스트(해발 8850m) 등정 △1991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등반 당시 사고로 열손가락 절단 △1997년 유럽 최고봉 엘브루스(5642m), 1997년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1998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59m), 1998년 매킨리, 2007년 호주 최고봉 코지어스코(2228m), 2009년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등정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