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두환 정권은 과외(課外)를 엄격히 금지했다. 중고등학생이 대학생에게 과외수업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재학생은 학원 수강도 일절 못하게 막았다. 사교육 열풍을 방지하고 학교 교육을 정상화한다는 명분에서였다. 서슬 퍼런 군부정권이 단행한 조치였다. 당시 사교육이 빚은 부작용이 심했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이 사교육을 통해 자식들에게 학습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기회의 평등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비밀과외를 시키다가 붙잡혀 숙청당한 고위 공직자 얘기는 큰 뉴스거리였다. 시범케이스 차원에서 과외를 한 대학생이 구속되는 사건도 비일비재했다. 지금이야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줄줄이 들어선 학원가는 재학생들의 애프터스쿨 코스이지만 당시엔 재수생 외에 학원 수강은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군사 정권의 강력한 단속에도 불구하고 과외는 사라지지 않았다. 음성적인 과외 거래는 물밑에서 이뤄졌다.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고자 독(獨)선생을 모시려는 부모들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외를 받거나 하다가 걸리면 패가망신한다는 위협을 느꼈기 때문에 과외비에 위험수당이 붙어 거래됐다.
과외 금지 조치는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에게 큰 타격이었다. 가난한 지방 출신의 서울 유학생의 생계가 위협을 받게 된 것이다. 예전 같으면 부잣집에 입주해 아이를 가르치면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지만 과외 금지 조치로 이런 길이 막혀버린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대학생들은 ‘향토장학금’(집에서 부쳐주는 등록금과 생활비)으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했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정에선 서울에 유학 보낸 아들, 딸의 생활비가 큰 고민거리였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대학생 과외에 대한 정부 당국의 단속은 느슨해지기 시작했다. 학부모들의 수요가 끊이지 않았고 지방에서 상경한 대학생들은 숙식과 생활비를 해결하기 위해 불법 과외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려웠다. 대학생들의 불법과외를 일컫는, 당시 유행하던 은어(隱語)가 ‘몰래바이트’였다. 남의 눈을 피해 몰래 하는 대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한 단어로 압축한 것이다. 당사자 간의 사적 계약으로 은밀히 거래된 만큼 수요와 공급은 지하시장에서 형성됐다. 명문대생일수록 불법 과외비는 높았다. 물론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한 어려운 처지에 있는 학생들을 위해 야학(夜學)에 나서는 자원봉사 대학생도 적지 않았다.
1989년 1월 24일 노태우 정부는 대학생 과외를 다시 허용했다. 학기 중에는 과외를 금지했지만 방학 중에는 학원 수강이나 대학생 과외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단속에도 불구하고 음성적으로 거래되는 과외 시장의 현실을 고려한 조치였다.
최영해 기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