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명원 화실/이수지 글·그림/48쪽·9500원·비룡소(초등 1∼3년)
어릴 적 그림을 곧잘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그림은 언제나 미술시간에 선생님이 교실 뒤 벽면에 걸어 두는 ‘잘 그린 그림’으로 뽑혔다. ‘나는 화가가 될 운명인가봐’라고 생각한 아이는 어느 날 집 근처 상가 3층에 새로 생긴 화실 간판을 운명처럼 목격한다. 그리고 ‘진짜 화가’를 만나 그림을 알아간다.
서울대 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뒤 영국에서 책과 미술이 결합된 북 아트를 공부한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다.
주인공 ‘나’에게 화가는 학교 미술선생님과 달리 방향을 정해 주지 않고 마음대로 그리도록 놔두는 무심한 듯한 스승이다. 그는 바가지를 스케치북에 그려 보라며 “세상을 뚫어지도록 열심히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
유화에 쓰이는 테레빈유 냄새가 나는 화가의 방은 멋진 그림들을 훔쳐보는 장소다. 나는 몰래 그의 방에 들어가 책장의 그림책과 벽면의 그림들을 섭렵한다. 언젠가 나도 그처럼 유화를 그려 보리라는 꿈을 키우며.
화가는 마음으로 사물을 보는 방법을 가르친다. 길 건너 앞산으로 처음 나간 야외스케치. 화가는 물을 그려 보라고 한다. 난감한 내게 그는 이렇게 말한다.
“물속에 잠긴 것, 물위에 뜬 것과 물위에 비친 그 모든 것이 물을 물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것이 물을 그리지 않고서도 물을 그리는….”
화가가 직접 그려 보내준 생일축하 카드는 그림의 감동을 알게 해줬다. 나는 색색으로 하나하나 점을 찍어 만든 생일축하 카드의 그림을 보며 생전 처음 “목이 따끔따끔한 것 같고, 가슴이 막 아프고, 가운데 배가 저릿저릿한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명원 화실은 어느 날 화재로 불탔고 화가도 어디론가 가버렸지만 나는 생일카드를 볼 때마다 내 그림이 누군가에게 “따끔따끔한 느낌을 줄 수 있을지” 생각한다.
스위스에서 출간한 ‘토끼들의 복수’로 2003년 스위스 문화부가 주는 ‘스위스의 가장 아름다운 책’ 상을 받은 저자가 노랑, 주황, 파랑 세 가지 색을 중심으로 그린 삽화는 화가가 되고픈 아이의 마음만큼 따뜻하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