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아흔아홉 굽이 대관령 옛길 아래의 깊은 산골이다. 요즘도 설을 쇠는 모습이 조선시대 한중간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명절이면 스무 명이 넘는 대식구가 연휴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시골집 마당에 모인다. 남자어른은 사극에서나 봄직한 모습으로 두루마기와 도포를 입고 갓과 유건을 쓰고 차례를 지내고, 그 모습 그대로 어른께 세배를 드리고 또 아이들의 세배를 받는다.
“다들 살기가 팍팍한 모양이네”
온 마을 사람이 촌장님께 합동세배를 올리는 풍습이 아직도 옛 모습 그대로 전해져 내려온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촌장어른으로 추대되는데 마을의 성년 남자 모두 의관을 갖추고 합동세배에 참여한다. 마을의 풍습이 이렇다 보니 명절에 한번 내려가면 내 부모형제만 만나고 오는 것이 아니라, 고향에 계신 어른과 나처럼 대처에 나가 있다가 명절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을 모두 만나고 온다. 고향 얘기뿐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인심을 듣고 오는 자리이기도 하다.
올해는 예전보다 합동세배 참석자가 많이 줄어든 모습이었다. 어른들은 날이 추우니 덜 모였다고 애써 돌려 말하지만 사실은 고향을 찾은 사람이 작년보다 줄어들었고, 고향에 와도 마을사람 앞에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머물다 돌아간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얘기일 것이다.
“나라 경제가 어렵다더니 다들 살기가 팍팍한 모양이네.” 합동세배 후 술잔이 도는 자리에서 한 어른이 말한다. 누구도 안 보이고, 또 누구도 안 보이고. 지난해만 해도 합동세배에 제법 두툼한 봉투를 들고 왔던 사람들이다. “누구는 일꾼 여남은 명 두고 하다가 아예 문을 닫았다는구먼” 하는 소리도 들린다.
군에 가 있는 집안조카에 대해서는 안부도 묻고 덕담도 건네지만, 군에 갔다 오고 대학을 졸업했는데 지금 바늘구멍 같은 취업준비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하는 일도 없는 조카에 대해서는 지금 무얼 하느냐고 안부조차 묻기가 조심스럽다. 어느 집 아이가 올해 대학에 들어갔다는 말에도 한두 마디 의례적인 덕담 뒤엔 “그렇게 대학을 나와서는 또 어떠할지” 하는 미리부터의 걱정이 뒤따른다.
당장 설 전에 발생한 일이라 용산 철거민 참사에 대한 얘기도 어김없이 나온다. 앞뒤 사정이야 있겠지만 다 살자고 하는 일에 위험하게 거기에 ‘석유통’을 왜 가지고 들어갔느냐고 철거민을 나무라는 어른도 있었다. 그러나 대개는 그런다고 가진 것 없이 쫓겨나는 사람을 토끼 몰듯 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한겨울 눈 속에 토끼사냥을 하다가 굴속에 들어가면 몇 번 몰아대다 말지 아궁이에 불을 디밀듯 그렇게 마구 하는 법은 없다고 했다.
두메고향 어른들의 나라 걱정
어른들에게는 크레인으로 특공대를 투입하던 모습도 충격적이었던 듯하다. 몇 년 전 무장간첩 소탕작전 때도 지켜보았지만 그때도 군인의 안전부터 가려서 작전을 펼쳤지 이번처럼 위험하게 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이쪽의 안전을 가리지 않는 작전이 저쪽의 안전을 가렸겠어?” 그 어른은 시너가 비처럼 쏟아지는 위험상황 속에 펼쳐진 작전이 저쪽 목숨의 안전에 대해선들 털끝만큼이라도 생각을 했겠느냐고 말했다. 한 어른은 경찰과 정부가 자꾸 법 법 하는데 그렇게 법을 어기면, 그 사람들도 국민인데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어도 되는 게 이 나라의 법이냐는 말도 했다.
돌아올 때 막히는 길까지, 유난히 춥고 갑갑하고 답답한 명절이었다. 그러면서도 명절을 쇠고 올 때마다 새삼 다시 느끼는 점이 있다. 오랜 세월 늘 아래로 베푸는 어른의 사랑과 그 사랑에 감사함을 느끼는 일, 그것이 우리 삶과 사회를 바르고도 따뜻하게 이끄는 사랑의 힘이 아닐까 싶었다.
이순원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