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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홍성욱]400년전 망원경이 본 진실

입력 | 2009-01-30 03:01:00


망원경의 발명자에 대해서는 논쟁이 수그러지지 않는다. 1608년 가을 망원경에 특허를 출원했던 네덜란드의 리페르스헤이가 첫 발명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2008년에는 스페인의 안경 제작자인 후안 로제가 진짜 발명가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그러나 이 기묘한 기구를 처음으로 과학과 접목시킨 사람이 갈릴레오 갈릴레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1609년 7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 머물던 갈릴레이는 먼 곳에 있는 물체를 크게 보도록 하는 기구가 발명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바로 망원경 제작에 착수해 그해 가을부터는 망원경으로 천체의 구석구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가장 놀라운 발견은 달 표면의 관찰에서 나왔다. 흔히 알려진 내용과 다르게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지금의 고배율 망원경과 달리 달 표면의 분화구를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다. 그가 망원경을 통해 처음 관찰한 것은 달의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을 가르는 경계가 육안으로 보듯이 매끈한 곡선이 아니라 울퉁불퉁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갈릴레이는 달에도 지구처럼 산과 분화구가 있으며 태양 빛이 산과 분화구에 부딪혀 그림자를 만들기 때문에 그 경계가 울퉁불퉁한 형태로 관찰된다고 추론했다.

갈릴레이 이전의 서양 지식인은 달 표면이 수정구처럼 매끄럽다고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이들 세계관의 일부였다. 전통적인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고정돼 있었고 달을 기준으로 우주가 달 위의 천상계와 달 및 지상계로 나뉘었다. 변화무쌍한 지상계와 달리 천상계는 완벽하고 영원했으며 달 표면이 매끈한 수정구 같다는 생각은 천상계가 완벽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에서 나왔다. 달 표면에 지구와 비슷한 요철이 있다는 갈릴레이의 발견은 2000년을 지탱해 온 전통적인 세계관의 붕괴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망원경이 갈릴레이에게 과학자로서의 명성만 안겨주지는 않았다. 당시 파두아대학교의 수학 교수였던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베네치아의 원로원에 소개하고는 그 대가로 연봉을 두 배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렇지만 곧 망원경이 전 유럽에 퍼져 있음을 알게 된 원로원은 갈릴레이의 연봉 인상을 미루고 평생 연봉 인상은 없다고 못 박았다. 실망한 갈릴레이는 망원경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됐는데 그 계기는 목성의 관찰에서 나왔다.

갈릴레이는 1610년 1월 망원경으로 목성을 관찰하다 목성에 4개의 위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 피렌체를 지배했던 코시모 1세가 목성을 신성하게 생각했고, 또 그에게 4명의 자제가 있다는 점에 착안해 자신이 발견한 4개의 위성을 ‘메디치가의 별’로 명명하고 자신의 발견을 메디치 가문에 헌정했다. 이러한 공로로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의 전속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용되었다. 연봉이 오른 것은 물론 더 중요한 변화가 뒤따랐다.

당시에는 자연철학자만 자연의 본질에 대해 논할 자격이 있다고 간주되었다. 수학자는 자연의 본질을 논하는 대신 현상의 기술에 만족해야 했다. 수학 교수에서 메디치 가문의 철학자가 되면서 갈릴레이는 지동설과 같은 우주의 구조, 원자론과 같은 물질의 본성을 본격적으로 논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당시 교회의 심기를 건드리는 얘기가 있었고, 이 논쟁은 1633년 종교재판으로 이어졌다.

망원경 관찰을 계기로 수학자에서 철학자로 신분 상승을 하면서 갈릴레이는 오래된 세계관과 새로운 세계관의 충돌에 스스로를 깊숙하게 개입시킬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 작은 도구는 근대 과학은 물론 갈릴레이의 삶에도 예기치 못한 변화를 안겨다 준 셈이다.

홍성욱 서울대 교수·과학기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