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을 처음 본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틈만 나면 떠드는 아이들과, 화를 잘 내는 담임선생님 사이에서 반장이었던 나는 몹시 힘들었다. 왜 그리 선생님이 싫었던지 담임 과목인 국어시간마다 몰래 ‘미술 완전정복’ 책을 펼쳐봤다.
‘미술 완전정복’에서 다른 미술책까지 이동하며 정복해갔다. 내 손에서 사랑스레 빛나던 화가는 모딜리아니, 고흐, 마그리트, 자코메티였고, 가슴을 몹시 술렁거리게 한 건 에곤 실레와 클림트였다.
여자들은 무의식에서라도 처녀 콤플렉스를 강요당했고, 성에 대한 관심을 보일 때 잘못하면 날라리라 눈여김을 받는 수상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찌할까. 특히 클림트 그림에 자꾸 매혹되는데….
나는 수줍음이 무척 많아, 뽀얀 우윳빛 가슴을 털렁거리며 여자들끼리 마주하는 목욕탕도 못 갔다. 그러나 클림트의 훌러덩 옷 벗은 여인이 아름다워 책을 자꾸 들여다보는 데는 서슴없었다. 나른하고 야릇한 쾌감. 있는 그대로 바람 속에 몸을 맡겨도 될 듯한 아름다움. 그렇다고 여인들은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기품 넘치고, 그의 그림들은 신비로울 만큼 에로틱했다. 불안과 두려움마저 달큰한 슈크림처럼 부드럽게 만들었다. 어른들 사랑의 세계가 궁금했고, 클림트가 그린 여인의 표정으로 상상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과감히 그려도 되는구나. 남 눈치 보는 허황된 마음이며, 위선의 엄숙주의 가면을 벗겨내는 그의 도전에 나는 사로잡혔다.
결국 완전정복과 그림책에 통달할 즈음 담임선생님한테 책을 빼앗겼고, 세월이 흘러 이렇게 클림트 원작 감상의 ‘완전정복’을 누리는 쾌감을 맛보게 되었다.
누구나 꿈꾸는 사랑의 로망을 그려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는 클림트의 ‘키스’보다 내게는 생각할 거리가 많은 ‘베토벤 프리즈’ ‘스토클레 프리즈’가 더 뜻 깊었다. 클림트가 표현하는 모든 에로틱한 표현이 다 담긴 종합선물세트이기 때문이다. 이 한 작품으로도 그의 표현 전부를 ‘완전정복’할 기회였다. 인생과 영혼, 우주의 교향곡, 그 원기 왕성한 기운이 전자파보다 더 저릿저릿하게 스며왔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그 벌꿀색 기운은 ‘유디트Ⅰ’에도 흥건하여 오싹할 정도로 100여 년 전의 여인은 막 그림 속에서 빠져나올 듯했다. 도대체 어쩌라고…여성인 나한테까지, 그 섹시한 표정으로, 하늘하늘한 스카프에 감싸인 채로 말이다. 유디트 시리즈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치명적인 오르가슴’과 팜 파탈이 뭔지, 얼마나 고결할 수 있는지 한 방에 보여주었다. 내 방에 걸고 싶은 그의 풍경화도 또 다른 매혹이다.
춥고 힘들수록 잃어버린 사랑의 감동을 되찾으며 살고 싶다. 클림트의 그림으로 나는 잊고 지낸 행복의 감각을 되찾았다.
신현림 시인·사진작가
▲동아닷컴 박태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