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의 서울은 첫사랑과도 같은 도시다. 비엔나는 꿀처럼 달고 물처럼 흐르고 술처럼 사람을 취하게 한다. 참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는 오스트리아와 뜻하지 않게 닮은 구석이 있다. 비엔나의 왈츠처럼 우리도 아리랑, 도라지, 양산도 같은 3박자의 음악이 있다. 게다가 지금 적어본 꿀, 물, 술처럼 리을 받침으로 끝나는 낱말이 많다는 점도 두 나라는 닮았다.
독일말로 쑤커라는 설탕이 비엔나에선 쑤컬이고 잘츠부르크의 명물 달걀 요리가 녹컬이다. 프란크란 사람 이름이 비엔나에선 프란클, 비엔나 오페라의 요절한 발레리나 크리스틀 침멀을 독일어로 번역(?)하면 크리스타 침머이다. 비엔나에는 사람도 음식도 음악도 심지어 조형물까지도 마치 요한 슈트라우스 동상을 둘러싼 ‘다뉴브의 여인들’과 같이 꿀처럼 달고 물처럼 흐르고 술처럼 취하게 한다.
그러한 비엔나를 상징하는 미술이 19세기 말 20세기 초 오스트리아의 제체션(분리파)이고 그 중심에 구스타프 클림트가 있다. 이번에 그 클림트 전시회를 서울서 본다는 것은 마치 젊은 날에 이역에서 사귄 첫사랑을 고향에서 재회하는 듯한 감흥마저 준다.
예술의 전당의 클림트 전은 거장의 여러 면모를 고루 보여준다. 보는 이를 아연케 하는 초기 인물 그림의 아크리비(극도의 치밀함), 분리파 운동을 선도 시위한 포스터, 큰 논란을 일으킨 비엔나 대학의 위촉 작품 ‘철학’의 밑그림, 한 점밖에 없다는 ‘베토벤 프리즈’의 레플리카, 수많은 여인상의 한가운데에 클림트 회화, 아니 오스트리아 회화의 한 정점이라 할 황금의 유화 ‘유디트 Ⅰ’.
비엔나를 서울서 만날 줄이야
젊은 날의 미식벽이 다시 돋는 듯 나는 가벼운 심미적 당뇨증세를 느껴 눈을 비벼본다. 반은 봉건적이며 반은 사치 산업과 상업으로 이루어진 도시, 왈츠를 숫제 수출상품으로 다루고 (중략) 명랑하기만 한 시민들이라는 광고용 이미지를 관광객에게 주는 도시라고 쏘아붙인 아도르노의 말도 떠올려 본다. 그래서 클림트도 숫제 수출상품으로 상업화하고 있는 아트숍이 성황을 이루고 있음도 본다. 그래도 그런 것을 넘어 비엔나는 나를 언제나 잡아끄는 또 다른 것이 있다. 이번 전시회의 대부분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벨베데레 궁!
나는 1965년 5월 15일 밸베데레 궁에 운집한 수만의 비엔나 시민과 함께 오스트리아 통일 독립의 국가조약 체결 10주년 축전을 경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분할 점령된 독일 오스트리아 한국 3개국 중 오스트리아는 가장 먼저 미-영-불-소 4개국 분할 군정에 종지부를 찍고 불과 10년 만에 통일국가로 회생한 냉전시대의 기적을 일궈낸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흔히 적(赤)과 흑(黑)의 모자이크라 일컫는 오스트리아 사회당과 국민당의 대(大)연정이 그 기적의 바탕이었다. 분할 군정이 실시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는 어느 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든, 또는 어느 당이 단독 내각을 구성할 절대 다수 의석을 획득하든 상관없이 대연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대통령이 사회당이면 수상은 국민당, 장관이 국민당이면 차관은 사회당이 차지하는 완벽한 모자이크 연립정부를 수립해온 것이다.
물론 위기는 있었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득표율 5% 미만으로 연정에서 소외된 공산당이 노동조합에 총파업을 지령했을 때다. 위기를 극복하는 데도 적과 흑의 모자이크는 완벽했다. 사회당은 노조의 총파업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고 국민당은 서방 군정당국을 찾아가 중립을 지키도록 호소했다. 그래서 소련이 개입할 구실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갈라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 고르지 못하면 갈라지고 고르면 뭉친다고 역설한 광복 직후의 사학자 손진태(孫晉泰) 선생의 격언대로다.
적과 흑 모자이크가 주는 교훈
벨베데레는 시원한 조망이란 이탈리아 말. 프랑스 말로는 벨뷔. 베를린의 독일 대통령 관저가 벨뷔 궁이다. 오스트리아는 54년 전에 통일됐고 독일 통일도 내년이면 20년이다. 한국은? 벨베데레의 시원한 조망은 없고 정치적인 분리파만이 갈수록 더욱 갈라져 싸운다. 이 눈먼 철부지 싸움을 앞으로도 얼마나 더 구경해야 되는 것일까.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