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신궁 세워 참배 강요
식민지 설움 ‘눈물의 계단’
앞으로 ‘서울 풍경에 말을 걸다’에서는 서울 시내 곳곳에 숨은 역사의 흔적을 찾아 독자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울 시민 가운데 서울 중구 남산 돌계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직접 가보진 않았더라도 TV나 영화에 자주 등장해 익숙한 장소다.
2005년 인기를 끌었던 TV 드라마 ‘내이름은 김삼순’에서 남녀 주인공이 입맞춤을 나누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되기도 했다.
남산 돌계단이 바로 ‘서울 풍경에 말을 걸다’의 첫 주인공이다.
첫 회를 으리으리한 궁궐이나 사찰이 아닌 돌계단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궁금할 것 같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쳤던 돌계단에 역사의 뼈아픈 상처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에 있던 국사당 신궁 내려다 본다고 인왕산으로 옮겨놔”
남산 돌계단은 n서울타워로 올라가는 길목에 자리 잡고 있어 주말이면 자녀들과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며 계단을 오르내리는 가족들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요즘은 남산 돌계단 위에 자리 잡았던 동물원과 식물원이 없어져 가족 단위의 나들이객이 예전 같지 않다.
40년 가까이 서울 시민은 물론 관광객들에게 관광 코스로 인기 높았던 남산 동물원과 식물원은 2006년 9월 서울시의 ‘서울성과 복원계획’과 ‘남산 제 모습 가꾸기 사업’을 이유로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식물원 철거는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됐던 일인지도 모르겠다. 남산 돌계단 위에 자리 잡았던 식물원 자리는 바로 일제가 세워놓은 조선 신궁(神宮)터였기 때문이다.
일본 신사(神社) 중 가장 격이 높은 게 신궁이다. 일제는 1910년 강제 합방 후 우리나라 전역에 신사를 건립한 데 이어 1920년부터 6년에 걸쳐 남산에 신궁을 지었다. 이후 조선인들의 참배를 강요해 1940년대 초에는 연간 참배객이 300만 명 선까지 늘어났다. 일제는 패망 후 신궁을 자진 해체했다.
남산 중턱에 신궁을 세운 까닭은 접근성 때문이었다. 서울 종로의 남쪽 지역을 가리키던 남촌(南村)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일제는 조선 신궁을 세우기 위해 남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國師堂)이라는 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겨버렸다. 조선 태조 때 세워진 이 사당은 무학대사, 천산수(天山水)의 삼신, 태조 이성계 등을 모시던 호국사당이었다. 일제는 조선 신궁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모시는 신을 조선의 신이 내려다 볼 수 없다며 사실상 쫓아낸 것이다. 그리고 참배객들이 신궁으로 오르기 쉽게 나무를 베어내고 돌계단을 깔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남산 돌계단이다.
조선 신궁에는 일본 건국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한반도 병참기지화 정책을 편 메이지(明治) 왕이 제신(祭神)으로 있었다고 한다.
신궁으로 향하는 이 돌계단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뜻한다. 조선인들에게 이 돌계단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를 강요한 신사의 참배로 기능을 했던 셈이다.
광복 후 수십 년간 우리들 뇌리 속에 잊혀졌던 조선 신궁은 1971년 남산 식물원을 증축하던 중 당시 전쟁 등 유사시 신궁의 위패를 보관하기 위해 지어진 대피소 입구가 발견돼 일제의 잔혹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기도 했다. 아직까지도 한국을 찾는 일본인 가운데 남산 신궁 터를 찾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초대 정부는 그 후 역사의 상흔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조선 신궁 터에 민족정기의 상징인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사당(祠堂)을 세웠다.
b>안현정 씨
건국대 공예학과 졸업. 성균관대 대학원 미술사학 석사과정과 동대학원 동양철학과(예술철학전공) 박사. 현재 서울예술대, 건국대 강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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