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2·8독립선언… 정부조차 어딘지 몰라”
올해 90주년을 맞은 3·1운동은 한 달 전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 기폭제가 됐다. 이후 한반도 일대와 중국 룽징(龍井·당시 북간도)의 대규모 항일시위로 확산됐고 4월 13일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이른다. 동아일보는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과 공동으로 3회에 걸쳐 당시 독립만세운동의 현장을 다시 돌아본다.
일본 프로야구 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홈구장 도쿄 돔. 자이언츠 소속 이승엽 선수의 활약을 응원하기 위해 한국 팬들도 많이 찾는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도보로 10여 분 떨어진 지요다(千代田) 구 니시간다 지요다퍼스트빌딩 서관 앞 도로. 행정구역상 니시간다 3-6인 이곳이 90년 전 일본 제국주의의 중심에서 한국의 유학생들이 조국의 독립을 외친 바로 그 장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 도로에는 원래 1919년 2·8독립선언의 결연한 함성이 울려 퍼졌던 옛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도로가 됐고 그 주변에는 고층빌딩이 빽빽이 들어섰다.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은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불타 사라졌다. 후신인 재일한국YMCA회관은 1980년 이 터에서 500m 이상 떨어진 곳에 들어섰다. 2·8독립선언기념비는 원래 터가 아닌 재일한국YMCA회관 앞에 세워져 있다.
90년 전인 1919년 2월 8일, 이곳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 유학생 학우회 임원 선거가 열린다는 통지가 유학생들에게 전달됐다.
도쿄 경시청에서 이미 눈치를 챘는지 오전부터 경찰들이 서성였다. 오전 10시 2·8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 소집청원서가 일본 정부와 일본 내 각국 대사, 공사,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일본 각지의 신문사, 잡지사, 학자들에게 우송됐다.
“조선독립만세” 외친 기독교회관 터엔 표석조차 없어
드디어 오후 2시. 도쿄 전체 유학생 600여 명 중 400여 명이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층 강당으로 몰려들었다. 분위기는 극도로 긴장됐다.
백관수(귀국 이후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다)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결연히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해…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독립을 기성하기를 이에 선언하노라.”
이어 김도연 선생이 “이 모든 항목의 요구가 실패될 때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포함. 이로써 발생하는 참화는 우리 민족이 그 책임을 지지 아니함”이라며 4개항의 결의문 낭독을 끝마치자 강당이 박수소리로 가득 찼다.
결의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400명 유학생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지난달 31일 동아일보와 만난 재일한국YMCA회관 다쓰케 가쓰히사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장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터인 도로변에 표석을 세우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나 “구청이 외국인의 독립운동 관련 기념비를 세우는 것에 미온적이다”며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우리 국가보훈처는 옛 회관의 정확한 현재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보훈처의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Ⅱ’(2002년)는 “현재 위치에서 좀 떨어진 지금의 니시간다 일대로 추정된다”고만 기록돼 있다.
○ 자결권 요구한 민족대회 소집청원서
독립선언을 앞두고 유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등사판을 빌려 와세다대 인근 유학생 김희술 선생의 집에서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600부를 인쇄했다. 민족대회 소집청원서는 최팔용 선생이 게이오대 인근의 이토(伊藤)인쇄소에서 1000부를 인쇄했다.
동아일보는 1일 다쓰케 실장의 도움으로 현재는 사라진 이토인쇄소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다. 도쿄 미나토 구 3-10-11. 빌라가 들어서 있지만 인근에 옛 모습이 일부 남은 인쇄소들이 보였다.
90년 전 이곳 인쇄기는 밤새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국내외 각계 민족대표가 모여 민족자결을 결의할 대규모 집회의 허가를 일본 국회에 공식 요구하는 청원서를 찍어냈을 것이다. 독립기념관 이정은 연구원은 “집회 결사가 금지된 상황에서 독립선언 이후 민족대표 집회를 열겠다고 통보한 것은 독립선언을 일회성으로 보지 않고 다음 단계의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말했다.
○ 국제정세 정확히 읽어
2·8독립선언의 주역들은 당시 토머스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에만 적용되는 것을 두고 우리 민족의 앞날을 걱정했다.
동아일보와 함께 현장을 찾은 동북아역사재단 장세윤 연구위원은 “패전국 아닌 일본의 식민지 조선에는 민족자결주의가 적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혈전’까지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통찰은 2·8독립선언이 젊은 혈기로 갑작스럽게 준비된 게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재일사학자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장은 “유학생들은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에서 독립을 주제로 오랫동안 정기적인 웅변회를 열어 세계 각국에서 집중된 최신 정보를 분석할 지적 체계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2월 7일. 백관수 선생의 집에서 유학생들은 후배들에게 말했다. “내일 다 붙들려 갈 것이오. 우리 뒤를 이어 잘 싸워 주시오.” 독립선언 뒤 조선기독교청년회관으로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난투극 끝에 학생대표 10명과 주동 학생 20여 명이 체포됐다.
○ 세계 각국으로 퍼져간 2·8정신
2·8독립선언 때 체포되지 않은 학생 중 100여 명은 2월 12일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앞에서 전 유학생대회를 열었고 13명이 검거됐다. 1920년 3·1운동 1주년 기념항쟁이 열려 53명이 검거됐다.
1일 히비야공원 소음악당 앞. 90년 전 긴박했던 만세운동의 현장은 휴일 여유를 즐기는 가족들의 산책 장소로 변해 있었다.
2·8독립선언의 정신은 국내와 세계로 퍼져 갔다. 송계백 선생이 2·8독립선언서를 숨겨 국내로 들어와 3·1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이광수는 중국 상하이에서 2·8독립선언문을 윌슨 대통령,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 데이비드 로이드조지 영국 총리에게 전송했고 중국 내 영자신문 2월 9일자를 통해 세계에 알렸다.
민족의 자기결정권을 주장하면서도 세계의 정의와 동양 평화에 우리 민족이 기여할 것이라는 열린 민족주의, 천부인권의 보편가치, 민주주의를 선진적으로 담아낸 2·8독립선언서. 그 사실을 한국인들은 얼마나 알고 있을까.
다쓰케 실장은 “호텔로 쓰이는 이곳 회관의 숙박객 중 30%가 한국인이지만 의미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회관이 운영하는 일본어 학교에 참가한 한국의 어린 학생들도 역사를 잘 모른다”며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더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도쿄=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2·8선언 낭독 백관수 선생 가족 “아버지는 민족을 가장 앞세우셨죠”
재일한국YMCA회관이 7일 상영하는 다큐멘터리 ‘2·8 독립선언’은 2·8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백관수(1889∼1950년 납북) 선생의 딸인 백경숙(83) 백경례(74) 여사를 인터뷰했다.
“아버지는 항상 봄을 그리워하셨습니다. 겨울은 모든 게 침체돼 있지만 봄이 되면 희망을 갖게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백 여사는 “당시 누구나 몸을 사려야 할 때였지만 당신은 애국심에 불타서 용감하게 먼저 시작하셨고 선언서도 낭독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언문을 쓸 때 일본인 하숙집 아주머니가 망을 봐준 일화도 전해주셨지요.”
백경례 여사는 “아버지는 애국심이 뚜렷해 불행한 시대에 국가관과 민족관을 가족보다 우선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2·8선언 다큐제작 김성웅 감독 “조국 사랑한 그 마음 오늘에 살려야”
“작품을 찍기 전의 저처럼 2·8독립선언을 잘 모르는 재일교포와 일본인도 당시 시대 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겠습니다.”
지난달 31일 재일한국YMCA회관에서 다큐멘터리 ‘2·8 독립선언’을 촬영하고 있던 김성웅(사진) 감독을 만났다. 이 다큐멘터리는 선언의 역사와 관련 자료, 선언 주역의 후손 인터뷰를 소개하고 있다. 재일교포 2세인 그는 교포 1세 할머니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찍은 바 있다.
김 감독은 “선언의 주역들은 지금 나보다 스무 살 이상 차이가 나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며 “그들이 용감하게 일어선 진심, 그것이야말로 우리 세대가 잃어버린 시대정신이고 그런 마음을 간직해야 이 세상이 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다쓰케 2·8선언기념자료실장 “2·8선언은 일본인도 배워야 할 역사”
“일본 고교에서 근대 한일관계사는 거의 배우지 않습니다. 이곳은 도쿄 한복판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을 외쳤던 학생들을 볼 수 있는 산 현장이에요. 일본인들도 당연히 배워야 하는 역사죠.”
한국말이 유창한 재일한국YMCA회관 다쓰케 가쓰히사(사진) 2·8독립선언기념자료실장은 독립선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선언으로 체포된 학생들을 구하려 한 일본인 변호사들처럼 어려운 시대에 참된 공생의 흐름을 만들려 한 일본인이 있었다는 걸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자료관은 일본의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들이 꾸준히 찾는다. 한국어와 한국사를 전공한 다쓰케 실장은 사물놀이를 배우고 싶어 YMCA회관을 찾았다가 한국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일본인의 삶을 업으로 삼았다.
▶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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