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의 만국 앞에 독립을 기성(期成)하기를 선언하노라.’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관 1층 강당에서 4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근촌(芹村) 백관수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일본 제국주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2·8독립선언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에만 적용될 뿐 식민지 조선엔 해당되지 않는다는 조선유학생들의 자각(自覺)에서 비롯됐다.
▷이보다 앞서 그해 1월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어 독립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을 결의한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는 실행위원으로 최팔용 김도연 백관수 등 10명을 선출했다. 실행위원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한 뒤 ‘민족대회 소집청원서’와 ‘독립선언서’를 작성하여 송계백을 국내로, 이광수를 중국 상하이로 파견했다. 송계백은 현상윤 최린 등을 찾아가 거사계획을 알렸고, 독립선언서 초안은 송진우 최남선 손병희 등에게도 전달돼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2·8독립선언 대회는 일경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실행위원 10명 등 27명의 유학생이 체포됐다.
▷2·8독립선언이 거행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 있던 도쿄 지요다구 니시간다 3-6 일대는 현재 도로로 덮여 있다. 회관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불타 사라졌고, 지금의 재일(在日)한국YMCA회관은 1980년 500m 이상 떨어진 곳에 세워졌다. 국가보훈처는 옛 회관 위치와 관련해 ‘국외독립운동사적지 실태조사 보고서Ⅱ(2002년)’에서 ‘현재 (회관이 서 있는) 위치에서 좀 떨어진 지금의 니시간다 일대로 추정된다’고 기록해 놓았다. 이후 재일한국YMCA는 옛 회관 위치가 니시간다 사거리쯤이라고 추정했고, 2006년경에는 사거리에서 100여 m 떨어진 옛터를 확인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6일 “(옛 회관 터를) 니시간다 사거리로 추정하고만 있었다”며 “정확한 위치를 올해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지금까지도 어디가 회관 터였는지 현장 확인이 안 돼 있다는 얘기다. 이날 서울 YMCA 강당에선 2·8독립선언 9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하지만 거사 장소조차 똑바로 밝혀내지 못한 후손으로서 선열들 앞에 면목이 없다.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