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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의 경쟁력]‘효녀 가수’ 현숙의 ‘의리’

입력 | 2009-02-08 11:50:00


"부모는 돌아가셨는데 효도했다고 상(償)이라니요. 그런 불효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가수 현숙(본명 정현숙) 씨는 28년간 중풍으로 누운 어머니와 7년간 치매를 앓은 아버지를 병수발하고 치매노인들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한 공로로 지난달 30일 제 33회 삼성효행상 특별상을 받았다. 불효(不孝)보다 효(孝)가 유별난 일이 된 요즘, '병수발 3년에 효자 없다' 는 말이 무색하게 오랜 시간 마음을 다해 부모를 모신 힘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비단 부모에게만 지극 정성이 아니다. 78년 데뷔 이후 매니저도 운전사도 단 한 명뿐이다. 매일 아침 들르는 대중목욕탕과 단골미용실도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다. 그녀는 '오뚝이 인생'을 불렀던 고 김상범 씨와 2004년 세상을 뜨기 전까지 가수와 매니저 사이로 지냈으며 마지막 가는 길에 상주 노릇까지 했다. 어머니를 담당했던 주치의한테는 지금도 설이나 추석마다 인사를 간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단골미용실에서 5일 만난 그녀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도리 아닌가요?" 하고 반문한다.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의리(義理)'파였다.

● 간병인도 없이 차에 태우고 다니며 병간호

그녀의 어머니는 1980년 중풍으로, 아버지는 1991년 치매로 쓰러졌다. 어머니는 거동이 불편했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항상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다.

"밤새 소리를 지르고 제 머리채를 잡아당기고 집 나가 버리시고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가 없었어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수시로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공연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아버지 속옷에 이름하고 연락처 바느질 하는 게 일이었죠."

그래도 간병인을 두지 않고 그녀와 6남매가 번갈아 옆을 지켰다. 바쁠 때는 자신의 차에 태워 함께 다니며 공연을 다녔다. 공연장에서도 앞에 돗자리를 깔아두고 아버지가 눈에 띄는 범위 안에 머물도록 했다.

"같이 다니면서 '아빠 여기는 한강이야', '엄마 저기가 방송국이야' 하면서 알아듣지 못 하시더라도 계속 말을 건넸어요. 엄마는 워낙 꼿꼿하고 자존심이 강한 분이라 제가 업고 가서 미용실에서 화장을 시켜 드린 뒤 외출을 했죠."

그녀는 96년 아버지와 영영 이별을 했다. 한 번도 부모가 돌아가실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던 그녀는 어머니도 잃을까 봐 몹시 두려웠다. 어머니는 약물 부작용으로 나날이 몸무게가 늘었고 나중에는 호스로 음식을 공급받으면서 연명했다. 그런 어머니 앞에서 냄새가 날까봐 불고기 한 번 마음대로 못 해 먹었다. 욕실에 데려가 손수 구석구석 씻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6월 아버지 곁으로 갔다.

"중환자실에서 욕창 없는 환자는 엄마뿐이었어요. 간호사 몰래 가재 수건 빨아서 하루에도 2~3번씩 닦아주고 했어요. 결국 내 생일 3일 앞두고 돌아가셨는데…, 아마도 생일 챙겨주고 싶어서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넘기고 그러셨지 싶어."

어머니 임종 이후 어머니가 모아뒀던 3700만원에 5000만원을 보태 투병생활을 하던 한양대 병원에 소아암을 앓는 어린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 "돌아보면 부모가 나를 돌보셨던 것."

어머니까지 여의고 난 직후에는 집에 들어가지도 못 했다. 훌쩍훌쩍 울고 있으면 친구인 김혜영 씨가 뛰쳐나와 집으로 데려가기도 하고 남동생네 집에 가서 잔 밤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심하게 앓았다. 그동안 피로가 쌓인 것인지, 긴장이 풀린 것인지 1년 6개월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내가 부모를 모신 것이 아니라 부모가 나를 돌보셨던 것이더라고… 편찮아 누워 계셨지만 '나 다녀올게', '다녀왔어' 그렇게 부비고 인사할 수 있었던 부모 품이 내 울타리였더라고요. 지방 공연 마치고 새벽 4시에 들어와도 엄마는 깨어 계셨어요. 나중에 말을 못 하실 때는 눈을 끔벅하시며 인사를 하고 나서야 주무셨죠."

그녀는 인터뷰 도중에도 "이제 현숙은 외톨이야"하면서 계속 눈가를 훔쳤다. 돌이켜 보면 부모의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기에 지금 현숙이 있는 것이라고 데뷔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는 갓 스물을 넘겼을 때 가수가 되겠다며 서울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아버지는 펄펄 뛰면서 반대했지만 그녀의 편이었던 어머니는 몰래 돈 1만원, 쌀 한 말, 김치 한 통을 건네주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온 그녀는 처음엔 서울 달동네 판잣집에서 김치볶음밥, 김치찌개만 먹으며 버텼다.

"서울로 가겠다고 집을 나서는데 뒤에서 엄마가 울고 계셨어요. 정말 성공해서 엄마한테 잘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았어요. 노래 한 곡을 불러도 최선을 다 했더니 어느 순간 유명해졌더라고요."

극구 반대를 하던 아버지는 나중엔 그녀가 드린 용돈으로 기차 여행을 다니는 게 낙이었다. 쓰러지기 전까지는 여행을 다닐 때마다 소주 한 병 사서 들고 다니며 "우리 딸이 가수요"하고 자랑을 했다. 그녀가 고향인 전북 김제에 내려 갈 때면 들국화를 꽂아 집 앞 길목에 꽂아 두었고 그녀는 꽃길을 밟고 집에 갔다.

"그런 부모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어요. 김제 고향마을이 정씨 집성촌인데 가족, 이웃, 친구들한테 부끄러운 사람이 안 되려고 바르게 살려고 했죠. 현숙 가족, 현숙 친구인 것을 기뻐하길 바랐어요."

그녀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당시 '건곤감래 청홍백'이 히트하고 난 이후 95년까지 긴긴 슬럼프를 보냈다.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힘든 날을 보냈다. 경제적 부담으로 아버지, 어머니 모시기도 빠듯했다. 1995년 그녀의 효행을 담은 TV 다큐멘터리가 전 국민을 울리면서 배경 음악이었던 '사랑하는 영자 씨'가 히트했다.

"두 분이 아니었으면 재기할 수 있었을까 지금도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효녀가수'라는 꼬리표가 싫었던 적도 있었지만 다시 노래를 하게 된 계기였죠. 그 이후로 '요즘 남자, 요즘 여자' '좋아 좋아''해피 데이' 등 히트곡이 꾸준히 나왔어요. 먼저 가신 아버지가 엄마 잘 돌보라고 도와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건강하게 낳아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주시고 간 분들이라고…그녀는 엄마, 아빠를 되뇌고 또 되뇌었다.


▲ 동아닷컴 정주희 기자

● 효행은 선행으로 이어져

그녀는 이번에 받은 상금 1500만원 전액을 노인 복지를 위해 '사랑의 리퀘스트'에 기부했다. 1996년 어버이날에 국민포장, 2001년에는 효령대상을 받았을 정도로 그녀의 효행은 소문이 자자하다. 하지만 요즘은 치매 노인을 위한 봉사에도 열심이다. 어려운 노인 분들을 보면 내 아버지, 내 어머니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남들은 그렇게 모셨으니 여한이 없겠다고 하지만 가슴이 저릿저릿 해요. 몸져누운 엄마는 늘 면 티와 기저귀 차림이셨어요. 아프기 전에 돈을 벌어 예쁜 옷도 사드리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녀는 2004년부터 치매 노인과 독거노인들을 위해 한 대 당 4500만원 가량인 이동 목욕 차량을 기증해왔다. 김제, 울릉도, 경남 하동, 충남 청양에서 4대가 운행 중이다. 목욕하기 싫다고 머리채를 잡으시다가도 목욕 시켜 드리면 방긋방긋 웃으시던 아버지, 이불 위에 눕히고 조심스레 옮겨도 여기저기 멍 든 자국이 남는 어머니가 생각나서다. 앞으로도 매년 기증을 계속해 전국에 이동 목욕 차량이 다니게 하는 것이 꿈이다.

"저 부자 아니에요. 마이너스 통장으로 목욕 차량을 기부한 적도 있어요. 그래도 부모 모실만큼, 남을 도울 수 있을 만큼 일이 끊이지 않으니 하늘에서 돌봐주신 덕분이라 생각해요. 삶의 목표가 있으니 당연히 일도 즐겁게, 부지런히 할 수 있죠."

● "돌아가신 후에 후회하지 마세요."

지인들은 그녀가 항상 긍정적이고 웃는 표정이라고 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제 몸 한 몸 돌보기도 힘든 것이 범인들의 생활인데 밤낮으로 수발을 들며 힘든 날이 없었을까. 한 번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없었는지 재차 물어보았다.

"몸은 물론 피곤하지만 정신은 더욱 강해졌어요. 눈꺼풀이 내려앉는 순간에도 엄마 기저귀가 깨끗한지 손을 넣어보고 자면 잠을 잘 자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다가도 몇 번씩 깨고는 했어요. 사람이 제 할 도리를 안 하면 마음이 안 편해요."

효가 귀한 세상이다. 부모가 아프면 요양 시설에 보내거나 간병인을 두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연예인의 삶을 살면서 제대로 젊음을 즐기지도 못 한 채 병간호에 매진한다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일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막상 그녀를 만나보니 손수 씻기고 먹여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밀한 경험들이 술술 풀려나왔다. 오늘의 불효막심한 자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없는지 물었다.

"어떤 자식이 일부러 불효를 하겠어요? 형편이 어렵고 환경이 안 되니 그렇겠지. 다만 부모는 큰 걸 바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돈 벌어서 효도해야지 하면 늦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며 당장 부모님한테 전화를 하라고 말했다. "엄마 회사 갔다 집에 왔어요 한 마디면, 우리 자식이 직장 무사히 잘 다니고 아픈 데 없고 집에도 안전하게 왔구나 이렇게 안심을 하세요. 부모님 걱정만 덜어드려도 효도죠."

우경임 기자 wooha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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