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든 지휘봉이… 제 발등을 찍다
“검투사처럼 싸워라” 黃의 주문
총자산 2년새 79조원 증가
“무리한 영업, 부실로 이어질라”
화려한 실적속에 신중론 묻혀
고위험 파생상품등 ‘묻지마 투자’
2조원 수혈받아야 할 신세로
2006년 초 황영기(현 KB금융지주 회장) 당시 우리금융그룹 회장 겸 우리은행장은 우리은행의 52개 지역 영업본부장에게 ‘칼이 든 지휘봉’을 선물했다. ‘자산 30조 원 늘리기’ ‘지점 100개 추가’ 같은 야심에 찬 목표를 내걸고 공격적인 영업을 독려하던 때였다. 주말과 휴일을 빼면 2.5일에 한 개꼴로 지점을 늘리고 매일 자산을 1200억 원씩 불려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였다.
“덩치를 키워야 살 수 있다”는 주문은 효력을 발휘했다. 우리은행의 총자산은 2005년 말 140조 원에서 2006년 말 186조5000억 원, 2007년 말엔 219조 원으로 급증했다. 외환위기로 막대한 공적자금을 받았던 ‘미운 오리 새끼’가 백조로 부활했다는 찬사가 나왔다. 우리은행의 급성장에 놀란 다른 은행들은 앞 다퉈 몸집 불리기에 가세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자산을 빨리, 그것도 많이 늘리려면 무리한 영업을 하기 십상인데 그러다 자칫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지만 신중론은 화려한 실적 속에 묻혔다.
3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글로벌 금융위기가 세계 금융시장을 덮쳤다. 우리은행은 12일 “6년 9개월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4분기(10∼12월)에 6911억 원의 적자를 냈다”며 ‘어닝 쇼크’를 고백했다.
외환위기 때 무려 8조7000억 원의 국민 세금을 들여 정상화시킨 은행이 다시 정부가 조성하는 자본확충펀드에서 2조 원을 수혈받아야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도대체 우리은행에서는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 “돌격 앞으로”, 전직 최고경영자(CEO)들의 공격 경영
“내년은 당분간 다시 오지 않을 시장 공략의 최적기다. 다른 은행들이 노조 문제와 통합 과정의 조직 갈등, 고객 이탈 등으로 어려운 상황을 겪으리라고 보기 때문이다.”
‘검투사’라는 별칭이 보여주듯 승부사 기질이 뚜렷했던 황 회장은 2005년 12월 월례조회를 통해 은행권에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했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LG카드 인수가 정부의 반대로 무산되고 신한은행이 조흥은행을 합병하면서 덩치 경쟁에서 밀리자 외형 확장을 성장 전략으로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당시에는 생소한 신종 파생상품에 투자해 수익모델을 발굴하려 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설명했다. 우리은행의 2006년 대출 증가율은 30.82%로 국내 은행 평균(13.8%)의 두 배를 웃돌았다.
투자은행(IB) 모델이 국내 금융회사의 미래상으로 주목받던 분위기에서 우리은행은 몇 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된 부채담보부증권(CDO), 신용디폴트스와프(CDS) 등 파생상품에 2005∼2007년 16억 달러를 선뜻 투자했다.
“우리은행의 자산 규모가 200조 원을 넘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국민은행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인수합병(M&A) 없이 이뤄낸 성과라 뜻 깊습니다. 은행업이 처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활용할 계획입니다.”
황 회장에 이어 취임한 박해춘(현 국민연금관리공단 이사장) 행장은 2007년 7월 취임 100일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자산 200조 원을 돌파한 실적을 자축했다. 그는 “지난 한 해에만 대출이 46조 원이나 늘어 부실을 걱정했는데 적극적으로 리스크를 관리해 크게 염려할 수준이 아니다”며 “지금 은행들은 ‘먹느냐 먹히느냐’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3년 동안 달성하려던 카드의 목표 시장점유율 10%를 1년 내에 이루겠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의 한 직원은 “결과론이긴 하지만 급속한 성장 이후에 제대로 리스크만 관리했더라도 손실은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 화려한 비상 이후 추락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가 글로벌 금융위기로 확산되면서 우리은행의 ‘고속 성장’에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우리은행의 지난해 당기순이익은 2007년보다 1조4554억 원(86.2%) 급감한 2340억 원으로 추락했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는 참담한 실적으로 우리금융의 주가는 12일 전날보다 590원(7.54%) 하락한 7230원에 장을 마쳤다. 황 회장이 취임했던 2004년 3월 수준으로 주가가 되돌아간 것이다.
우리은행의 자본적정성을 보여주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과 기본자본비율(Tier 1)은 각각 11.7%, 7.7%로 당국의 권고치(각각 12%, 9%)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은행이 엄청난 적자를 낸 것은 CDO, CDS 등 파생상품 투자로 4000억 원의 평가손실을 본 데다 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부실 여신에 대해 1조 원 이상의 대손충당금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는 금융시장 상황이 나빠진 탓도 있지만 무리한 외형 성장의 후유증이라는 분석이 적지 않다. 1차 구조조정 결과 우리은행의 부실 건설사 대출은 4500억 원으로 4대 시중은행 중 가장 많았다.
○ 외형 집착으로 리스크 관리 실패
우리은행 고위 관계자는 “은행은 제조업체처럼 매출을 늘리는 외형성장을 하기보다는 내실을 갖췄다가 불황기에 무너지는 은행을 사들이는 보수적인 전략이 필요했다”며 “외형 경쟁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리스크 관리 시스템이 무너진 게 너무 뼈아프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은행 경영진 중 상당수가 예금보험공사의 징계를 받았다. 황 회장은 퇴임 후인 2007년 CDO, CDS 손실과 관련해 경고에 상당하는 성과급 차감의 징계 조치를 받았다. 이종휘(현 우리은행장) 당시 수석부행장도 성과급이 깎였고 IB본부장이던 홍대희 부행장은 정직 요구 조치를 받았다. 박 행장은 2008년 3분기 재무목표 미달로 주의 상당 조치를 받았다.
한국증권연구원의 남길남 연구원은 “저금리 시대에 더 수익성이 높은 신종 금융상품에 투자한 것 자체를 비난할 수는 없다”며 “다만 새로운 상품에 투자하면서 신용위험에 대한 충분한 평가와 대비가 없었다는 점이 문제였다”고 말했다.
단기 실적 위주로 금융기관 임원을 평가하는 방식도 우리은행의 ‘비극’을 불렀다는 지적이 나온다. 3년 임기의 CEO가 재임 중 성과를 내기 위해 성장성을 강조하다 보면 상업은행의 근간인 안정성과 수익성이 훼손될 수 있다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이에 따라 은행 임원을 평가할 때 단기보다는 장기, 성장성보다는 수익성과 건전성의 비중을 높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우리은행은 1998년 외환위기 이후 부실이 커진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의 합병으로 탄생했다. 정부는 예보를 통해 우리금융지주에 12조7000억 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했다. 이 가운데 8조7000억 원이 우리은행을 살리는 데 들어갔다.
박용 기자 parky@donga.com
신수정 기자 crystal@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