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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경쟁력]영화배우 안성기의 ‘한 우물 파기’

입력 | 2009-02-15 08:26:00

영화배우 안성기씨는 50대 후반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미중년의 대명사다. 사진=스포츠동아 이해리 기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홍콩의 대표적인 배우 류더화(왼쪽)와 대화중인 안성기씨-아역시절을 포함해 50년 이상 한국 영화발전에 투신한 그는 자체로 한국영화의 상징이 됐다(上). 동아일보 자료사진영화 한반도에서 대통령역으로 출연한 안성기 그는 한때 정치권 영입 0순위 인물이었지만 그의 완강한 고사로 성사되지 못했다(下).[연합]


안성기가 출연한 드라마는 □□□

"왜요? 영화에선 볼 수 있겠죠. 전 이미 대통령도, 한 나라의 임금도 다 해본 사람인데, 국회의원 정도야…, 허허"

파안대소를 하는 그의 얼굴 위로 잔주름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배우 안성기(57) 씨. 10여 년째 끊이지 않는 정치권의 러브 콜을 거론하며 '혹시 국회에서 보게 될 가능성이 있느냐'고 물어도 그의 답은 여전히 영화를 향해 있었다.

안성기는 이름 자체로 '한국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배우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발표한 '한국영화 100선' 목록에서 가장 많은 영화(14편)의 주인공을 맡았다. 1957년 만 5세에 영화 '황혼열차'의 아역으로 영화계에 데뷔한 뒤 2008년 '신기전'의 세종대왕 역에 이르기까지 52년 간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금방 떠오르는 히트작만 살펴봐도 '바람불어 좋은 날'(1980, 이장호 감독) '만다라'(1981, 임권택) '칠수와 만수'(1988, 박광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이명세) 등 그를 제외하고 한국 영화를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잠시 영화를 쉬었던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학창시절마저 마치 영화배우를 위한 충전기라고 여겨질 만큼 그는 영화에 몰두해 왔다.

그의 기나긴 영화 목록을 보다보면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어째서 영화배우였을까? TV드라마나 연극무대 역시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데도 말이다. 심지어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어떤 배우는 "여의도 정치판 역시 무대의 연장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안성기의 대답은 간명했다. 영화배우가 "내 체질에 맞고 내가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50여년에 걸친 '한 우물 파기'가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동아닷컴 이철 기자

● "영화배우만 하기도 바빠요"

"1980년에 딱 한번 방송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단막 형사극 시리즈였는데 친한 선배 PD가 너무 끈질기게 요청해서 마지못해 범죄자로 등장했어요. 그런데 해보면서 '아, 방송은 영화와 많이 다르구나'하는 생각만 들더군요. 단 이틀 만에 50분짜리 드라마를 찍어 내는 속도였는데, 그 정도는 영화라면 두 달 이상 걸리는 작업이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로는 드라마와 인연을 끊었죠."

그는 자신과 영화의 인연을 운명으로 설명했다. 아역배우 경험을 끝으로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려고 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한국외국어대 베트남어학과를 졸업한 뒤 학사장교까지 지망했지만 갑작스레 베트남 전쟁도 끝나고 전공을 살릴 길이 없자 '어쩔 수 없이' 영화판으로 되돌아갔다는 것. 대학 때 잠시 연극을 해보기도 했고 TV의 영향력이 커진 80년에 한 번 '외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영화의 마력에서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고 말한다.

TV, 연극 등 다른 무대엔 눈길을 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 그는 "건방지게 말하면 영화배우 하기도 바빠서, 라고 말해도 될까요?"하고 너털웃음을 짓더니 "솔직히 말하면 무대 공포증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영화는 수없이 많은 NG 속에서 OK를 골라내는 과정이잖아요. 영화배우는 NG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연극이나 생방송 같은 것은 자신의 NG가 결국 실수로 각인되는 거니까 참 감당하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니면 너무 어릴 적부터 영화라는 메커니즘에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죠."

일단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가는 그의 '한 우물' 속성은 CF나 다른 활동에서도 두드러진다.

그는 편안하고 부드러운 이미지가 잘 맞아 떨어진 동서식품의 커피광고를 26년째 하고 있다. 또 1991년 시작한 유니세프(UNICEF) 한국위원회 친선대사이자 홍보모델 활동이 18년째다. 무료로 활동하는 자리를 그토록 오래 꾸준히 지키고 있다는 것도 그의 성품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 정치권의 구애… 거절도 만성이 돼

한국영화 최고의 스타에게 방송계와 연극무대에서만 러브 콜이 왔을까.

가장 적극적으로 그를 원한 쪽은 1990년대부터 구애의 손짓을 시작한 정치권이었다. 이미지 정치가 본격화된 뒤 적잖은 연예계 인사들이 금배지를 달았고 정치인들은 이들을 선거에 요긴하게 활용해왔다. 한국 연예시장이 커지다 보니 원로 연예인들의 관직 진출도 일반화 된지 오래다. 사정이 이러니 '천하의 안성기'에게 쏟아진 제안의 수준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이다.

"여러 곳에서 제의가 왔죠. 그런데 체질적으로 안 맞더군요. 감투를 쓰려면 견고한 체제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건 너무도 부담스럽고 억지로 떠맡는 일이잖아요. 제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모든 즐거움과 행복을 느끼고 싶어서거든요. 그런데 그것 못하게 되면 제가 불행해 지는 거 아니겠어요?"

그에겐 최근까지도 공직에 대한 제의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거절이 만성이 됐는지 제의하는 쪽에서도 '저 친구는 정말 영화가 좋은가 보다'하는 일종의 공감대(?)까지 형성됐을 정도란다.

안성기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꾸준함'이다. 아무리 예능인이라지만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한 우물을 판다는 게 한국적 상황에서 어디 그리 쉬운가. 그 때문인지 그의 모습에는 한 분야에 매진한 장인(匠人)의 풍모가 배어 있다. 영화에 일로매진(一路邁進)해온 그의 이력은 그의 설명처럼 '어쩔 수 없어'서 라기 보다는 일종의 '천성(天性)'같기도 하다. 단적인 예가 그의 일상에서 묻어나오는 꾸준함이 바로 그것이다.

● 꾸준한 안성기, 신뢰감의 상징으로

그의 꾸준함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바로 영화계에서 후배들을 챙기는 그의 배려심이다.

그는 자신을 초대한 영화계 후배들의 결혼식에는 어떤 바쁜 일이 있더라도 꼭 참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저 눈도장만 찍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사진촬영 때까지 남아 자리를 빛내 준다는 것.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결혼사진에 안성기가 찍혀 있으면 후배들이 아이들에게 자랑할 거리가 하나 느는 게 아니겠냐?"고 답변한 적이 있다. 과연 지금도 그 원칙을 지키고 있을까?

"(조금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사실 그런 편이에요. 계속 그래왔는데 이제 안 가면 '아, 왜 내 결혼식에만 안 왔지'라고 서운해 할까 걱정이죠. 그런데 생각해 보면 휴일에 투자되는 에너지가 상당하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길게 여행을 못가는 것이 너무 아쉽죠. 이제는 나 자신도 조금은 챙기고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타협점을 찾아야겠죠. 허허"

사람들은 그의 나이가 어느새 60을 바라보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깜짝 놀라곤 한다. 실제 겉모습에 비치는 그의 나이는 40대 초반에 불과하다. 2006년 작 '실미도'에서는 그의 탄탄한 몸매가 공개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물론 50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된 그의 치열한 자기 관리 덕분이다.

언젠가 절친한 후배 박중훈 씨가 그가 다니던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하면서 "어휴 선배님은 살 안 찌는 체질이라 너무 좋겠다"고 부러워하다가 몇 달 뒤엔 그의 운동량을 보고 "아, 원래 운동을 많이 하시는 군요!"라고 감탄했을 정도란다.

"영화배우는 감독이 원하는 이미지를 충분히 소화할 정도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거든요. 영화 '추격자' 보면 두 배우가 한 1~2분 뛰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런 장면 하나 촬영하려면 배우들은 밤새 달린다고 생각하면 돼요. 체력이 없으면 연기고 뭐고 절대 불가능한 거죠. 그리고 몸이 날렵해지면 더 많은 역할을 다양하게 펼쳐 보일 수 있잖아요. 그저 아저씨 같은 역할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아직도 연애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허허"

그는 인터뷰 내내 '죽는 날까지 영화배우를 하겠다'는 의지를 자주 비쳤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대로만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도 그것을 잘 알고 있다는 듯 "제작진이 원하고 무엇보다 관객들이 저를 원할 때까지"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를 위해 그는 지금도 밤낮으로 자신의 피가 끓게 만드는 시나리오를 찾고 있고, 달리기를 하며 자신의 몸을 더욱 단단하게, 사람들과의 만남까지 자제해가며 자신의 감수성을 예리하게 다듬고 있었다.

정호재 기자demia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