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3월 6∼14일 열리는 ‘피가로의 결혼’의 주역으로 고국 무대에 처음 서는 바리톤 윤형 씨. 그는 “무대에 서기 직전 긴장을 즐겨야 최고의 음악을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다”고 말했다. 김미옥 기자
“실력으로 편견 극복, 美무대서 진 적 없어요”
《초등학교 1학년 때 교내 노래대회에 나갔다. ‘쟁쟁한’ 6학년 누나들을 제치고 대상을 받았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께 예술고등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주먹으로 두들겨 맞았다. 포기했다. 고등학교 3학년 가을, 진로를 고민했다. 딴 건 몰라도 노래만큼은 져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 성악과 시험 딱 한 번만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떨려서 직접 못 가르치겠다’면서 제자를 소개해줬다. 12주 레슨을 받았다. 서울대 성악과에 입학했다. 그 대학생이 이제는 미국 오페라 무대에서 자리를 잡았다. 바리톤 윤형 씨(41)다. 그 험난한 길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주먹까지 휘둘렀던 아버지가 2007년 타계한 바리톤 윤치호 씨다.》
윤 씨는 3월 6∼14일 서울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 재개관 기념작인 ‘피가로의 결혼’에서 알마비바 백작으로 출연한다. 고국 무대는 처음.
그는 미국으로 간 지 12년 만인 2004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섰다. 한인 주역 바리톤으로는 최초였다. ‘한인 최초’라는 수식어를 단 건 메트가 처음이 아니다. 뉴욕시티 오페라, 워싱턴 오페라, 로스앤젤레스 오페라, 샌타페이 오페라 모두 최초의 한인 바리톤이었다.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피닉스심포니와는 한인 성악가 최초로 협연했다. 그를 13일 예술의 전당에서 만났다.
―‘한인 최초’라는 말, 부담스럽지 않았나요.
“미국에서 먹고살려고 열심히 했을 뿐인걸요. 모든 오페라단은 앞으로 3년 정도까지의 계획만 세워둬요. 오페라 가수에게 주어진 안정된 생활의 최대 기간이 3년인 거죠.”
미국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야채가게 계산원, 한인교회 성가대 지휘자로 생계를 꾸려 가기도 했다.
“학교 마치고 첫 3년이 가장 힘들었어요. 보수는 적지만 꼭 하고 싶은 일, 돈은 많이 주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 일은 꼭 동시에 들어오더군요. 돈과 상관없이 미래가 보이는 쪽을 골랐어요. 아주 영리했다고 생각해요. 노래하는 사람은 굶고 배고파 봐야 해요.”
생활고만이 아니었다. 뉴욕시티 오페라 시절, 55개 도시 순회공연에 나섰을 때였다. 조지아 주 서배너에서 ‘피가로의 결혼’을 공연했는데 지역 일간지에 리뷰가 실렸다. 그에 대한 대목.
‘소리를 들었을 때 이탈리아 출신 가수 같았는데, 무대에 나온 사람은 동양인이었다. 외모 때문에 균형이 맞지 않았다. 동양인에게서 이탈리아 가수 같은 소리가 나오다니!’
이런 편견과 장벽을 실력과 노력으로 넘어가는 그는 “무대에서만큼은 실패해 본 적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성악가로서 순탄한 길만은 아니었다.
그는 서울대에서 4년간 테너로 수업을 받았다. 고음이 잘 나지 않았다. 노력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 교수는 계속 기다려 보라고만 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1992년 미국 보스턴대 대학원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다. 담당 교수가 말했다. “넌 바리톤이야!” 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대학 땐 왜 테너를 고집했나요.
“멋있으니까요. 아름다운 노래는 다 테너의 몫인 줄 알았거든요. 아버지를 보니 바리톤 곡은 복잡했고, 오페라에선 주로 악역을 맡았어요. 그런데 바리톤으로 전향한 뒤 ‘진짜 노래’를 했어요. 바리톤과 테너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어느 음역에서 ‘골든 보이스’가 나느냐는 거예요. 아버지께선 ‘거 봐라’ 하시더군요. 알고 보니 바리톤도 좋은 노래가 많더라고요.”
고음을 드나들 줄 알기에 오히려 그는 ‘독특한 바리톤’이 됐다.
―아버지 생각이 많이 나겠어요.
“예고 간다고 했을 때 왜 때리셨는지 지금은 이해해요. 성악가는 모든 걸 몸으로 때워야 하는 중노동자거든요. 끊임없이 경쟁해야 하고요. 유학 갔을 때 아버지께 국제전화가 걸려 오면 ‘열심히 해라’라는 말씀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어요. 대신 전화기에 대고 발성을 하셨죠. ‘나도 계속 공부한다. 나 달라졌지?’라는 뜻이죠. 그런 아버지 장례식 때 참석을 못했어요. 메트 오페라 리허설 첫날이었거든요….”
그는 큰 눈을 깜박깜박하더니 “아버지 얘기는 좀 있다 하죠”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2002년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가 지원하는 ‘젊은 예술가 프로그램’에 선발됐지요.
“도밍고가 1991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했어요. 저금을 탈탈 털어 10만 원짜리 표를 샀지요. 그때 도밍고를 만나리라 상상이나 했겠어요? 그는 부지런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노력하는 예술가예요. 리허설 때 동네 아저씨 같은 허름한 차림이지만 굉장한 집중력을 보여요. 도밍고는 늘 ‘내가 쉬면 나는 녹슨다’고 말했어요.”
성악가로서 사는 일을 그는 유랑극단 배우의 삶에 빗댔다. 무대 밖에서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생활이다. 공연을 위해 1년에도 수개월씩 집을 떠나기 일쑤. 유학 시절 만난 아내 황현정 씨(40)와 딸 로다(13)가 든든한 버팀목이다.
―아버지께서 한국 무대를 보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2006년 샌타페이에서 식도암으로 투병하시던 아버지와 듀오 콘서트를 했던 생각이 많이 나요. 이번 한국 무대를 보시면 ‘자식, 혼자 많이 컸군’ 하셨을 거예요.”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윤형 씨
△1968년 출생 △서울대 성악과 졸업 △미국 보스턴대(석사) 커티스음대(오페라 전공) 졸업 △1997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주최 콩쿠르 파이널리스트 선정 △2001년 미국 성악 콩쿠르 ‘설리번 어워드’ △2004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한국인 바리톤 주역으로 데뷔. ‘팔리아치’의 ‘실비오’ 역 △2007년 홍혜경 김우경 씨와 ‘메트를 정복한 최초의 한인 성악가’ 카네기홀 공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