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밀러의 원작을 21세기 한국 상황에 맞춰 번안한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한 장면. 사진 제공 극단 라이프씨어터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이 초연된 해가 1949년이다. 1930년대 대공황기를 겪었던 작가의 절절한 체험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60년 전 이 작품이 ‘지금, 여기’의 이야기로 관객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것은 왜일까.
서울 대학로 라이프씨어터에서 ‘아버지 열전 시리즈’ 1편으로 공연 중인 ‘세일즈맨의 죽음’(김혁수 각색, 김성노 연출)은 밀러의 원작을 철저히 한국의 상황에 맞춰 각색한 작품이다.
정확히 어떤 제품을 팔고 다니는지 불분명했던 윌리 로먼은 경기 의정부시에 사는 보험설계사 황원석(김인수)으로 바뀌었다. 그는 평생을 바친 보험사에서 밀려나 의정부에서 충남 보령시까지 출퇴근하면서도 집 대출금 잔액과 아내의 김치냉장고 월부금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지 못한다. 윌리의 희망인 두 아들 비프와 해피는 도준(이상범)과 현준(이철희)이 된다. 한때 고교 농구 스타였던 도준은 중국에서 부동산사업으로 큰돈을 벌겠다고 설치지만 백수나 다름없고 현준은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전전한다.
원작은 자본주의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미국 중산층의 ‘소리 없는 비명’을 그렸다. 번안 작품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자식에 대한 기대감이 오히려 가족과 멀어지는 역효과만 초래하는 한국 가장의 역할비극에 무게중심을 뒀다.
한국형 윌리인 원석은 고집불통에 권위적인 아버지다. 속으론 아내 이문자(김명희)에게 미안한 마음뿐이면서도 버럭 소리 지르기 일쑤고 밖에선 자식 자랑을 하다가도 밥상머리에 마주보고 앉기만 하면 잔소리다. 장남 도준은 그런 아비의 속 깊은 정을 잘 알면서도 그 앞에만 서면 변변치 못한 자신의 현실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져 반발을 거듭한다.
실업 걱정으로 가슴을 졸이는 아비와 취업 걱정으로 밤잠을 못 이루는 자식의 한숨이 교차하는 한국의 시대적 감수성을 정확하게 찌르는 지점이다. 3월 29일까지. 2만 원. 02-742-357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