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법사상 작고한 유태흥 전 대법원장만큼 큰 사건의 주심을 연거푸 맡은 판사도 없다. 대법관 때인 1980, 81년 ‘10·26사건’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심판사였다. 주심 선정에는 신군부의 뜻이 반영됐다. 유 대법관의 주도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신속한 사형 확정판결이 내려졌다. 그 공인지 그는 1981년 선배 대법관을 제치고 대법원장에 올랐고, 전임 이영섭 대법원장은 ‘회한과 오욕’이란 말을 남기고 2년 만에 하차했다.
▷대법원의 경우 통상 주심판사는 판결에 큰 영향을 미친다. 수사 및 재판 기록과 판례 검토, 판결문 작성 등을 담당해 해당 사건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3명으로 구성된 고등법원과 지방법원 합의재판부의 경우 재판 진행은 재판장이 주관하고 2명의 배석판사가 사건을 나눠 주심을 맡는다. 주심판사의 의견은 존중되지만 생각이 다를 때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기도 하며, 재판장이 최종적으로 조정역할을 맡는다.
▷광우병 공포를 왜곡 과장한 MBC ‘PD수첩’ 제작진을 상대로 시청자 2400여 명이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을 기각 판결한 주심판사가 논란에 휩싸였다. 민주당 천정배 의원의 딸이란 사실 때문이다. 천 의원은 지난해 촛불시위에 직접 참여하고 촛불시위 합법화를 위한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재판부인 서울남부지법 민사16부는 “PD수첩이 다수의 시청자에게 정신적 고통을 줬다 하더라도 손해배상책임을 물을 수는 없으며, 촛불시위를 유도했다는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이 PD수첩 제작진을 기소해 유죄판결을 받아낸다면 이 민사소송의 결론이 달라질 수도 있다.
▷원고 측 변호를 맡은 변호인단은 “주심판사가 촛불시위를 옹호한 천 의원의 딸이므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며 재판부 기피 신청을 냈으나 기각됐다. 아버지와 딸은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아버지가 직접 관련된 사건이 아니므로 곧바로 재판의 공정성을 시비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재판장이 주심을 두 명의 배석판사 중 다른 판사에게 맡겼거나 주심 스스로 사건을 회피했더라면 같은 결론이 나왔더라도 논란을 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육정수 논설위원 soo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