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값 아끼기? 맛과 재미에 소통의 도구로
인사팀-IT팀 함께 앉아 하하…호호…‘도시樂’
“곧 돌아올게. 꼼짝 말고 기다려. 사랑한다….”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 ‘F4’ 멤버인 구준표(이민호)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은 금잔디(구혜선)는 망연자실한 채 손에 들고 있던 도시락을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 소풍을 가기 위해 전날 밤부터 손수 준비했던 계란말이와 소시지 구이는 물론이고 흰 밥 위에 새긴 완두콩 하트, 김 조각을 흩뿌려 나타낸 구준표의 곱슬머리는 도시락이기보다 ‘마음’ 그 자체였다. 하지만 구준표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에 떠나가 소풍은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도시락은 살아남았다. 드라마 속 구준표 도시락을 너도나도 만들고 있는 것. 그 중에는 ‘하우매니70’이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도시락 블로거 김인경(38·인터넷 상담사) 씨도 있다. 김 씨는 최근 ‘꽃보다 남자’ 드라마에 빠진 어린 아들을 위해 구준표 도시락을 만들어 조리법과 사진을 인터넷 블로그에 올리며 화제를 모았다.
또 다른 풍경 하나. 12일 낮 12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야후 코리아’. 도시락통을 든 5명의 여자 직원들이 회의실로 모였다. 치열한 회의 자료가 적힌 화이트보드 아래로 어느새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시어머니가 싸주신 유기농 반찬이야” “언니는 잡곡밥이네?”라며 왁자지껄한 분위기.
부서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지만 이들은 점심때만 되면 도시락통을 들고 뭉친다. 야후 코리아의 도시락파, 이들에게 도시락은 ‘도시의 락(樂)’이었다. 그 즐거움은 이들이 직접 만든 3행시에 고스란히 담겼다.
“도! 도착하자마자 먹고 싶다. 시! 시간 안에 먹어야 한다. 그렇지만… 락! ‘락’ 그 자체. 즐거움을 주는 나의 행복, 도시락”
○ 도시락 한 입, 여유 한 토막… 도시락을 다시 꺼내 든 사람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10여 년 만에 다시 꺼내 든 도시락. 점심 값 아껴 보겠다는 사람들부터 도시락을 앞에 두고 소통하려는 회사 내 임원들, 도시락을 먹으며 즐겁게 수다를 떠는 여자들….
사람들이 도시락통을 다시 꺼냈다. 매일 점심시간 도시락을 함께 까먹는 야후 코리아 도시락파 멤버들 역시 마찬가지. 도시락에 대한 생각은 제각각이었다.
“시어머니께서 귀농하셨어요. 직접 기른 유기농 채소를 주시는데 안 먹고 버리는 게 많아 큰 마음먹고 도시락을 싸기 시작했죠.”(인사팀 한수연 대리)
“다른 팀 직원들과 점심을 먹기 시작했는데, 어느 날부터 제 컴퓨터 고장 났다고 말하면 멤버 중 ‘IT팀’ 언니가 와서 고쳐주고…. 도시락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됐죠.”(‘거기’팀 노유선 대리)
이들 대부분은 도시락을 직접 싼다. 그러다보니 과거에 비해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됐다. 한 끼 평균 5000∼6000원 하는 점심 값을 줄이다보니 한 달에 10만 원 절약도 거뜬하다. 음식점 자리가 없어 기다려 먹느라 낭비하는 시간도 없어졌다.
하지만 ‘도시락 효과’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6개월 째 도시락을 싸오는 야후 코리아 미디어팀 이용삼 차장은 ‘도시락=금연도구’라고 말한다.
“15년 넘게 피우던 담배를 끊겠다고 했더니 아내가 도시락을 싸주더군요. 금연하면 식욕이 강해진다는 이유에서 과일과 야채 위주로 싸줬죠. 그러다 보니 담배도 자연스럽게 끊을 수 있더라고요.”
생활 패턴도 달라졌다. 일찍 귀가해 남는 시간에 청소, 육아 등 가정 일을 도맡아 한다. 무엇보다 식비(5000원 한 끼) 10만 원에 1주일에 6∼7갑을 피웠던 담뱃값을 절약하다 보니 한 달에 17만∼20만 원 정도를 아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혜택. ‘모범 가장’으로 거듭난 이 차장은 얼마 전 이렇게 모은 돈으로 내비게이션을 구입해 주말마다 가족을 데리고 동물원, 유원지 등을 돌고 있다.
우리아비바생명 방카슈랑스팀 서영주 씨 역시 사내에서 ‘도시락족’으로 통한다. 경제 위기에 박봉인 월급, 결혼 문제 등 ‘돈 고민’을 떠안고 살던 서 씨는 점심 값이라도 아껴볼 생각에 올 초부터 도시락을 싸서 다닌다. 처음엔 여직원 휴게실에서 혼자 도시락 뚜껑을 열었지만 소문이 퍼지면서 하나 둘 서 씨 옆으로 직원들이 모였다. 그렇게 두 달 만에 모인 직원은 6명. 어느새 이들은 서로 분담해 비빔밥을 해먹을 정도로 친해졌다. 점심 값 아껴 디지털 카메라를 새로 장만한 사진 마니아가 있는가 하면 영어학원을 다니는 사람 등 멤버들은 남는 돈으로 자신에게 투자하고 있었다. 모두 도시락 하나 덕분이었다.
골라먹고 나눠먹고… 情이 ‘쑥쑥’ 절약은 ‘덤’
○ 즐거움, 그리고 소통의 도시락
지난해 말 취업정보업체 ‘커리어’는 직장인 1671명을 대상으로 도시락에 관한 설문 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약 3분의 1인 523명(31.3%)이 최근 경기 불황으로 점심식사 해결방법을 바꿨다고 응답했다. 이 중 39.2%인 205명은 집에서 도시락을 싸온다고 답했다. 이들 대부분은 ‘식비 절약’(86.3%)이 이유라고 말했다.
도시락을 싸는 것이 더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 시대. 도시인의 ‘락(樂)’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비단 점심 값 때문만은 아니다. 몸짱이 되기 위해 ‘닭 가슴살 도시락’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다. 또 지난해 멜라민, 이물질 검출 등 먹을거리 문제가 나라 전체로 번지며 ‘안전한 음식’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것도 도시락의 부활을 가능케 했다. 이로 인해 현대백화점은 올 초부터 2월 12일까지 보온도시락, 찬합 등 도시락 용기 제품의 매출액이 1230만 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1100만 원)에 비해 12% 늘었다.
하지만 도시락의 묘미를 외적인 곳에서 찾으려는 사람들, 이른바 도시락을 소통의 도구로 여기는 최고경영자(CEO)들도 있다. 2년 전 ‘런치 위드 CEO’ 이벤트를 만든 코오롱아이넷 변보경 대표는 매달 한 번씩 직원들과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변 대표는 “임원이 아닌 직장 선배, 인생 선배로서 직원들과 소통하기 위한 것”이라며 “사내 동호회 설립이나 여직원 휴게실 설치 등은 실제 점심 미팅 때 직원들이 제안한 것들”이라고 설명했다.
도시락이 소통의 도구 역할을 하는 것은 온라인 내 도시락 동호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회원수 1만1700명을 자랑하는 도시락 동호회 ‘여보의 도시락’은 출장파티 요리 전문가 김주리 씨가 남편에게 도시락을 싸면서 우연히 만든 것. 하지만 지금은 김 씨 같은 30대 주부들이 주축이 돼 도시락 레시피부터 재료 등 도시락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는 사이트로 바뀌었다. 김 씨는 “음식 얘기뿐만이 아니라 남편 얘기, 고민거리, 재테크 등 도시락을 통해 불황을 극복하려는 주부들의 의지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 도시락 부활… 시장은 뜨겁다!
사람들에게 도시락은 즐거울 ‘락(樂)’. 하지만 시장은 뜨거울 ‘핫(HOT)’이다. 도시락을 찾는 사람이 늘면서 ‘한솥도시락’ 등 도시락 전문업체들이 호황을 맞고 있다. 주머니가 가벼운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 한솥도시락의 ‘치킨마요덮밥’(2500원)은 지난해 12월 매출이 3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165% 늘었다.
패스트푸드, 패밀리레스토랑 등 외식업체들은 도시락 메뉴를 내놓으면서 동시에 갖가지 기발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 지난달 ‘런치박스’라는 점심 메뉴를 내놓은 KFC는 주 고객층이 피곤한 직장인임을 감안해 수면을 돕는 수면양말을 사은품으로 주고 있다. 베니건스는 직장인, 여행객들로 붐비는 서울역점과 명동점에서만 도시락 메뉴를 별도로 판매 중이다. 베니건스 측은 “보통 기업 회의가 잦은 월요일을 중심으로 월 평균 1000개 가까이 팔려나간다”고 설명했다.
호텔업계는 웬만한 정식 코스 요리 부럽지 않은 ‘고급화’ 도시락으로 승부수를 띄우고 있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일식당 ‘하코네’에서는 자체 제작한 특수 위생 용기에 도시락 요리를 담아낸다. 일반적으로 나무나 플라스틱으로 만드는 도시락과 달리 위생 열처리가 돼 있으며 별도 코팅 처리가 돼 있다.
도시락은 이제 불황기 ‘끼니 때우기’ 수단이 아니다. 전문가들은 비용 절약 그 이상의 문화적 코드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현재 도시락 문화를 이끄는 주체는 ‘3040’세대”라며 “이들은 도시락을 통해 과거 추억을 공유하고 그로 인해 생긴 정신적 ‘유대감’을 즐기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
디자인=박초희 기자 chocky@donga.com
▲[2009. 2. 19]뉴스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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