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주의자/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민승남 옮김/376쪽·1만2000원·민음사
평생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가 있었다. 그가 쓴 소설은 모두 열네 권이며 등장인물만 127명. 작가는 물론 자신이 만들어낸 그 모든 인물들을 또렷이 기억한다. 치버란 이름을 가진 이 남자가 평생 종이 대신 머릿속에 소설을 쓴 것은 자신의 첫 작품이 모든 출판사에서 출간을 거부당한 이후부터다.
머리에서 완벽하게 정리가 될 때까지 소설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그는 마침내 오랜 시간 생각에 몰두해 역작을 완성하고 타자기 앞에 앉는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숨 막히는 권태를 느낀다. ‘이미 머릿속에 다 들어 있는데 굳이 종이에 옮길 필요가 있을까?’ 이미 다 아는 내용을 292페이지나 칠 생각을 하니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몇 주 동안 타자만 치고 있느니, 새로운 작품을 계속 구상하는 쪽을 택한 그는 마침내 머릿속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문인 구역에 묻히며 생을 마감한다.(‘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평가를 받는 추리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집 ‘완벽주의자’는 두 권의 단편집 ‘여성혐오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바람 속에서 서서히, 서서히’를 한 권으로 묶어낸 것이다.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낯선 승객’, 르네 클레망 감독의 ‘태양은 가득히’,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 등이 모두 하이스미스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여성혐오에 관한 짧은 이야기들’ 편에서는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기법으로 공포와 불안감을 유발하거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짤막한 콩트들이 주를 이룬다. ‘중산층 주부’는 온건하고 보수적인 가정주부가 페미니스트 집회에 참석해 겪는 이야기다. 이웃집 주민들이 급진적 견해를 피력하며 군중의 지지를 받는 것을 본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반대 의견을 말한다. 하지만 그가 성난 여자들이 던진 토마토, 계란을 맞다 급기야 통조림통에 맞아 즉사하는 결말은 파시즘 광기의 섬뜩함을 느끼게 한다. 아마추어 바람둥이였으나 결혼 뒤 법의 보호, 사회의 승인, 남편의 재정적 지원 아래서 전문적인 바람둥이가 된 한 여인이 남편을 비만으로 만들어 심장마비를 일으키게 해서 교묘히 죽이는 ‘허가된 매춘부, 혹은 아내’ 등이 실려 있다.
‘바람 속에 서서히, 서서히’에는 단편 분량의 작품이 주로 수록됐으며 추리와 호러뿐 아니라 SF와 ‘머리로만 책을 쓴 남자’처럼 유머와 연민과 감동이 녹아든 작품까지 다채롭게 살펴볼 수 있다. 하이스미스 특유의 심리 서스펜스가 드러난 표제작과 ‘기이한 자살’, ‘윌슨 대통령의 넥타이’, 무분별한 개발과 환경파괴 등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는 ‘나무를 쏘지 마시오’, 중산층의 속물근성에 대한 풍자를 담은 ‘인맥’ 등을 수록했다.
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