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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2-25 13:51:00


이야기'판'의 진리 : 판 위의 이야기는 돌수록 더 뜨거워진다. 네 품은 이야기를 들려다오. 그보다 훨씬 끔찍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화답하리.

격투가 변주민이 꾸벅 배꼽 인사를 하자, 아줌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쳤다. 자연스럽게 아줌마가 탁자 앞으로 나섰다. 무거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목걸이와 팔찌와 발찌가 출렁이며 맑은 소리를 냈다. 실내 온도가 적정 수준을 유지하였지만 그녀의 이마에선 벌써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도그맘이라고 해요. 본명이야 따로 있지만 41년 하고도 2개월 5일을 도그맘으로 지냈답니다. 어디서부터 41년 하고도 2개월 5일이냐고요? 당연히 강아지를 처음 구입한 날이죠, 호호호! 도그맘 나이 아홉 살 때였는데요. 아버지가 품에 안고 오신 푸들 강아지, 베니스라고 이름 지었답니다, 그 앙증맞은 녀석과 눈을 맞추는 순간 도그맘은 평생 개들과 살기로 결심했답니다. 지금까지 모두 533마리의 애완견을 키웠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 스무 마리와 함께 생활했답니다. 도그맘 취미는 오직 하나, 귀여운 녀석들에게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치는 거랍니다. 당연히 엄마가 할 일이죠. 성급하게 가르치진 않아요. 차근차근 똥오줌 가려 누는 법부터 앉는 법, 간단한 도구들을 찾아오는 법, 제 시간에 잠자리 드는 법 등을 배우고 나면, 한결 삶에 활력이 붙는답니다. 강아지들은 실수를 해도 용서하고 반복 학습을 시킨답니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하는 경운 없으니까요. 문제는 늙어서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녀석들이랍니다. 강아지 때부터 도그맘 이 두 손으로 키운 녀석들이죠. 헌데 늙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녀석들이 갑자기 침대에 똥을 싸대질 않나 도그맘 귀한 패물을 창문 밖으로 휙휙 던져버리지 않나 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해가 뜰 때까지 마루를 슬금슬금 기어 다니질 않나."

"그래서 그 개들의 다리를 하나씩 차례차례 자른 겁니까?"

"시끄럽고 더럽고 혼란스러워서 도무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어요.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도그맘이지만, 다른 개들도 상당히 심각한 상처를 입었지요. 경고를 했는데도 말을 듣질 않으니 처벌할 수밖에 없었답니다. 처음부터 다리 넷을 모두 자를 생각은 아니었어요. 다리 하나를 자르고 나니 더욱 제 멋대로 구는 겁니다. 앞다리 둘을 자르니 뒷다리만으로 기어서 소파를 물어뜯고 난리를 피우더군요. 다리 넷이 잘린 다음에도 몸을 뒹굴며 발악할 정도랍니다. 열아홉 마리의 평안을 위해 한 마리를 벌 준 것뿐인데, 이런 도그맘을 '동물학대죄'로 잡아들일 수 있는 거예요? 도그맘은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답니다. 도그맘은 개들 곁에 있어야죠. 도그맘이 없으면 강아지들이 배를 쫄쫄 굶어요. 아, 또 늙은 녀석들이 거실과 방을 온통 어지럽혔겠죠? 그 짓을 못하게 말려야 하는데…… 도그맘은 가야 해요 당장!"

아줌마가 갑자기 출구 쪽으로 뛰어갔지만 노원장은 느긋하게 쳐다보기만 했다. 그녀는 방을 벗어날 수 없었다. 굳게 잠긴 출입문은 오직 노원장의 떨림이 잦은 목소리에만 반응했다. 도그맘이 제풀에 지쳐 자리로 돌아가자, 노원장의 시선이 불량 학생에게 향했다.

"자, 이번에는 방문종 군 차롑니다. 졸업반이군요."

문종은 좌중의 시선이 싫은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썅! 싫어. 왜 내 얘길 이 딴 데서 해. 나 안 해."

노원장이 사람 좋게 웃으며 다시 권했다.

"예외는 없습니다. 앵거 클리닉을 마치지 않으면 진학이든 취업이든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알지요? 특별시민 자격이 박탈될 수도 있습니다."

"몰라, 그딴 거. 나 안 해. 의사 양반. 어차피 난 또라이로 낙인 찍혔어. 그냥 냅둬."

문종이 바닥에 침을 찍 뱉었다. 노원장이 차트를 뒤적거렸다.

"어디 봅시다…… 대단한 게임 마니아로군요. 보름 전에는 버츄얼 월드(Virtual World)에서 어울린 팀원을 현실 세계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출구를 봉쇄한 후 구타했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현실도 아니고 버츄얼 월드야. 가상일뿐이라고."

"이 대가리의 피도 안 마른 새끼가……."

볼테르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기 전에, 주민의 돌주먹이 문종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도그맘도 어느새 문종의 옆구리를 머리로 들이받았다. 노원장이 말릴 사이도 없이 환자들이 뒤엉켰다. 앵거 클리닉 개원 이래 처음 발생한 폭력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