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진화 유전자’는 리더십과 위기관리 능력
척박한 환경 딛고 국가주도 초고속 성장 ‘최초의 변이’
리콴유 실용주의, 무하마드 도전정신이 진화 원동력
글로벌 경제위기에 맞서 ‘제2의 변이’ 성공할지 관심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격’, ‘러시아와의 분쟁으로 한겨울에 가스 공급이 끊겨버린 우크라이나와 유럽’. 올 초 터져 나온 굵직한 국제뉴스만 보더라도 21세기 글로벌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힘의 논리다.
강대국들은 국제법을 무시하며 국제기구의 조정을 무력화시키고 있고 때로 무력 공격 같은 극단적인 힘 과시를 통해 협상 테이블에서도 주도권을 잡고 있다.
적자생존, 약육강식은 모든 생명체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다. 치열한 생존경쟁을 통한 변화야말로 진화의 기본 동인(動因)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들의 삶도 마찬가지이지만 21세기 글로벌 시대에는 국가와 도시의 변화 속도도 급속히 빨라졌다.
싱가포르와 두바이는 현대 도시 진화의 급속한 변이를 보여 주는 대표 국가다. 두 나라 모두 국가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어려운 척박한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화려한 탈바꿈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금융위기의 직격탄으로 크게 휘청거리고 있다.
▽극적인 성공=‘아시아의 허브’로 불리는 싱가포르는 서울 면적만 한 작은 땅덩이에 인구도 300만 명밖에 되지 않는다. 국토를 넓힐 간척사업에 쓸 모래나 자갈은 물론 먹는 물까지 모두 수입해야 할 만큼 부존자원도 빈약하다.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처럼 덩치 큰 이슬람 국가들에 둘러싸여 있고, 주변국에서 몰려온 다인종의 이주민들 사이에서는 민족의 개념이나 응집력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회적으로도 항구도시의 성격상 도박과 매춘, 마약이 성행했고, 이로 인한 각종 범죄와 부정부패도 골칫거리였다.
두바이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랍에미리트의 토호국 중 하나인 이 작은 도시는 이주민 3000명으로 이뤄진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국토 면적은 제주도의 두 배밖에 안 될 정도로 작은 데다 90%는 사막이 차지하는 낙후지역이었다. 여름이면 섭씨 5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도 개발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하지만 두바이는 개발도상국은 물론 선진국과 각종 외신에서도 앞다퉈 거론되는 국가로 성장했다. 사막 위에 세운 스키장, 세계 최초의 수중 해양도시 ‘워터프런트’ 건설 프로젝트, 세계 최고층 빌딩 등을 선보이며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세계 최대의 인공 섬 건설을 통해 국토 지형까지 바꿔 버렸다. 미국의 에너지 및 군수기업인 핼리버튼은 두바이의 성장 가능성을 보고 2007년 본사를 아예 이곳으로 옮겼다.
싱가포르는 1990년대 ‘아시아의 4마리 용’ 중 하나로 불리며 급성장하는 경제력을 과시했다. 각종 국가경쟁력 순위에서 상위권을 놓치지 않았고,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하는 부패지수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나라 1, 2위에 잇따라 올랐다. 싱가포르투자청(GIC)과 테마섹은 2007년 씨티그룹 조사에서 세계 최대 국부 펀드 리스트에 올랐다.
▽비결은?=이 두 나라의 역동적 진화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전문가들은 리더십이야말로 가장 결정적인 원동력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싱가포르에는 리콴유 전 총리가, 두바이에는 최고지도자인 셰이흐 무하마드 빈 라시드 알막툼 국왕이 있다.
이들의 거침없는 상상력과 도전 정신, 이를 바탕으로 한 정부 주도의 과감한 외자 유치와 개발정책이 오늘날의 국가를 만드는 바탕이 됐다.
리콴유 전 총리는 무려 31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국가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한다”는 실용주의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냈다. 충돌이 잦았던 다인종 사회의 통합과 부정부패 척결에도 힘을 쏟았다.
무하마드 국왕은 BBC 방송 등 각종 인터뷰에서 “나는 도전을 좋아하고 불가능한 것을 보면 가능하게 만들고 싶어진다”, “두바이에서는 실패를 제외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며 도전 정신을 강조해 왔다. 두바이의 성공이 석유 덕분이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두바이의 현재 석유 의존도는 국내총생산(GDP)의 3%밖에 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는 점이 주목할 부분이다. ‘두바이 아이디어 오아시스’라는 싱크탱크에는 2000명이 넘는 인재가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속가능한 성공은 가능할까?=모든 국가와 도시가 당면한 문제는 한 세대의 성공이 대를 이어 ‘유전’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장력의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지구촌을 평평하게 만드는 세계화 덕택에 한 나라나 도시의 진화에는 내부요인만이 아니라 외부요인의 변화도 중요한 요인이 됐다. 최근의 글로벌 경기침체는 그 가능성을 흔드는 최대 변수이다. 싱가포르나 두바이처럼 크게 성공했던 나라들이 타격을 크게 받고 있는 것은 역설적이다.
싱가포르 정부는 22일 “나라 경제가 독립(1965년) 후 최악의 경기침체에 직면했다”며 2009년 경제성장률 전망을 ―5∼―2%로 하향조정했다. 지난해 4분기 GDP 성장률은 전년 동기 대비 16.9%나 줄었다.
두바이도 현재 신규 건물의 대규모 미분양 사태가 벌어지는 등 사상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걸프지역에서 두바이의 기업신뢰지수 하락폭이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아랍에미리트에서 100억 달러에 이르는 긴급지원까지 받았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이 두바이의 성공을 배우자고 한 게 불과 몇 달 전임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과연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장대익 동덕여대 교수는 “환경에 적응한 결과 나타난 결과물이 중요한 게 아니라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자체를 변이 유전자로 볼 수 있다”며 “국가나 도시의 진화도 이런 전제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관점에서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하는 시도가 이어진다면 성공적인 유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두 국가는 변화하는 환경에 맞춰 새로운 생존 전략을 고심 중이다. 싱가포르는 최근 경기부양을 위한 거액의 감세정책과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향후 2년간 6억 달러를 투입하는 근로자 재교육 사업과 기업 활성화를 위한 대출 확대 정책 등도 마련했다. 두바이도 경기침체가 본격화되던 지난해 11월과 12월에 1285건의 신규사업을 승인하며 기업 활동을 촉진했다.
과연 두 나라의 미래 모습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들은 다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 세계는 다시 주목하고 있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