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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뮤지컬 多覽族을 아십니까

입력 | 2009-02-26 02:57:00


“한번 보고 두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1. 울산에 사는 이하루 씨(28·학원 강사)는 두 권의 스크랩북을 갖고 있다. 한 권당 공연 표 80장이 들어가는 책에는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 표 160장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다. 이 씨는 2004년 친구 손에 이끌려 우연히 보게 된 후 매달 일정액을 ‘지킬용 적금’으로 할애한다. 요즘도 그는 이 작품의 서울 공연을 보러 토요일 오전 서울에 올라와 일요일 오후 늦게 내려가는 강행군을 하고 있다.

#2. 손성희 씨(32·회사원)는 2006년 4월부터 뮤지컬 ‘헤드윅’을 190번 본 ‘헤드윅 마니아’. 이제는 무대 뒤편에서 연주하는 밴드의 실수까지 꼼꼼하게 모니터한다. 그는 빠듯한 월급에 10만 원 안팎의 공연 티켓을 사는 게 부담스럽지 않으냐고 묻자 “남들이 한 달 유럽여행을 갔다 올 비용으로 3년 동안 더 오래 행복했으면 된 거 아니냐”고 말했다.》

“배우-객석위치따라 새 느낌”

마니아층 갈수록 급증

공연애착 바탕 제작 관여하기도

○ ‘헤드윅’만 190번 관람… 질리지 않는 ‘현장성’ 장점

영화 드라마 콘서트와 달리 뮤지컬에는 최소 30번부터 최대 200번까지 같은 공연을 ‘보고 또 보는’ 마니아 관객이 많다.

이들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같은 공연을 반복해서 본다는 뜻에서 ‘다람(多覽)족’으로 불린다. 공연 예매사이트 인터파크에 따르면 뮤지컬 공연 가운데 ‘맘마미아’ ‘캣츠’ ‘노트르담 드 파리’ ‘지킬 앤 하이드’ ‘헤드윅’ ‘김종욱 찾기’ 등의 재관람률이 다른 공연의 평균보다 높게 나타났다.

‘다람족’이 같은 공연을 반복해서 보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같은 공연이라고 해도 프로덕션과 연출, 배우와 컨디션, 객석 위치 등에 따라 전혀 다른 공연을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뮤지컬 평론가인 이유리 교수(청강문화산업대)는 “뮤지컬은 중독적인 ‘경험재’라는 특성이 있어 특히 다른 장르에 비해 반복적으로 작품을 보는 마니아가 많은 분야”라고 말했다.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50번 관람했다는 최효선 씨(23·대학생)는 “무대 공연은 생방송으로 제작된 드라마와 같다. 볼 때마다 한 장면 한 장면이 새롭고, 보면 볼수록 몰랐거나 이해하지 못한 장면들을 재발견하는 재미가 있다”고 말했다. 경남 김해시에 사는 그는 2007년 10월 김해에서 라이선스 개막 공연을 본 후 서울, 대전, 대구, 경기 성남시 등 전국 투어와 갈라 콘서트까지 관람했다.

장기 공연되는 뮤지컬이 많아지며 △캐스팅과 연출 등에 변화를 준 시즌제 도입 △주인공이 세 명인 ‘트리플 캐스팅’의 보편화 등 달라진 공연 환경도 다람족이 증가하는 이유로 꼽힌다. ‘김종욱 찾기’를 50번, ‘아이 러브 유’를 38번 봤다는 직장인 정성엽 씨(35)는 “아무리 좋은 공연도 다섯 번 정도 보면 질린다. 하지만 요즘 공연은 배우들이 몇 개월 단위로 바뀌고 같은 배우들로도 다양한 조합을 구성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를 80번, ‘김종욱 찾기’를 54번 본 이선규 씨(35·보건복지가족부 사무관)는 다람족의 등장을 ‘2030세대’들이 콘서트장에서 공연장으로 옮겨간 것이라고 해석했다. “1990년대 아이돌 스타를 쫓아다닌 팬덤 문화를 경험한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세대들이 경제력에 걸맞은 취미생활로 공연장을 택했다.”

○ 전문식견 내세워 ‘생산적 소비자’로

공연 예술은 객석의 힘이 다른 문화 상품에 비해 큰 편이다. 이러한 까닭에 ‘다람족’은 전문가 못지않은 정보와 애착을 바탕으로 캐스팅부터 대사 연출 등 공연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효선 씨는 “조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공연에서 조명 핀이 맞지 않거나 스테인드글라스 문양이 조명과 맞아떨어지지 않는 작은 실수들을 발견하고 이를 제작진에 건의해 대화를 나누면서 작품과 더욱 심리적으로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며 “배우의 립스틱 색깔이 마음에 안 들어 제작진에 직접 건의했고 반영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오 당신이 잠든 사이’를 55번 정도 봤다는 직장인 차용홍 씨(35)는 2007년부터 배우, 연출가와 관객이 만나는 ‘클럽 데이’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이 자리를 통해 연출가에게 흐름에 맞지 않는 대사나 캐스팅의 교체를 요구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공연 기획자는 “연출가보다 공연을 더 많이 본 ‘다람족’들은 공연의 든든한 지원자이자 깐깐한 ‘시어머니’ 같은 존재”라며 “연출의 고유 권한을 크게 침범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의견을 받아들이려고 한다”고 말했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