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일찍부터 추기경 주목… 亞 주교단 리더로 여겨
항상 넓고 깊게 생각하셔… 선친 장면총리 애제자이기도
“저희들도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과 처지가 다른 40만 명이 자발적으로 명동성당까지 와서 추위 속에 3, 4시간씩 기다리며 추기경님을 추모하고 갔습니다. 정말 고맙고 감사한 일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추기경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러 왔다기보다는 ‘고맙다’고 인사하러 다녀가신 것 같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을 비서신부 등으로 4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필해 온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76)는 23일 오후 강원 춘천시 교구청 집무실로 불쑥 찾아 간 기자에게 “먼발치에 있었던 사람들은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수 있지만 지척에서 모셨던 사람은 좀 그렇지 않느냐”며 한사코 인터뷰를 고사했다. 법정 스님과 장 주교의 오랜 친분을 거론하며 30여 분을 보내자 서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20일 추기경 장례미사 당시 몇 차례 눈물 흘리는 모습이 TV에 비쳤다고 하자 “그 장면이 어떻게 카메라에 잡혔을까요. 눈물을 안 보이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되더라고요. 자꾸 울컥울컥 했어요…”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육신의 아버지인 제2공화국 수반 장면 국무총리(1899∼1966)의 제자인 김 추기경은 그에게 때론 아버지 같고 큰형님 같은 존재였다.
―추기경님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됐습니까.
―추기경님은 부친인 장면 총리의 제자라고 들었습니다.
“예. 아버님이 동성학교 교장으로 재직할 때 무척 아끼고 사랑한 제자였습니다. 알려진 이야기지만 당시 일제가 모든 학교에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천황의 칙유(勅諭·친히 내리는 말씀)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문제를 냈는데 추기경님께서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쓰셨대요. 아버님께서 남들이 보는 데서 따귀를 한 대 때리셨지만 불문에 부치고 일본 유학을 보내주셨다고 합니다. 그 후로 여러분에게 ‘저 친구를 눈여겨봐라. 큰 인물이 될 사람이다’고 말씀하셨다고 해요. 언젠가 추기경님께서 제게 ‘장 교장 선생님이라면 내 속을 털어놓아도 될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썼던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추기경님이 생시에 장면 총리를 성인으로 추대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얘기하셨습니다. 제 처지에서는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사견임을 전제로 말하겠습니다. 교황청은 광복 당시부터 유엔보다 앞서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고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 파송 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한국 천주교의 수난사를 주목해 왔습니다. 또 천주교의 큰 물줄기를 ‘개인 구원’에서 ‘사회 구원’으로 바꾼 제2차 바티칸공회(1962∼1965)의 정신을 꿰뚫고 있는 분을 필요로 했고 추기경님은 유학 당시 이런 시대정신을 온몸으로 체득하셨습니다. 특히 추기경님이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으로 재직하면서 보여준 개혁적 태도를 주목했을 겁니다. 추기경님은 일찌감치 ‘교회는 세상의 일부이며, 세상 안에 있고,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는 확신을 갖고 계셨습니다.”
―교황청 고위층의 추기경님에 대한 평가는 어땠습니까.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아시아를 방문한 바오로 6세께서는 김 추기경을 아시아 주교단의 리더로 생각했고, 한국을 두 번이나 다녀가신 요한 바오로 2세는 추기경 때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인 데다 교회에 대한 두 분의 생각이 일치했습니다.”
―‘추기경 김수환’의 가장 뛰어난 점과 핵심 사상을 말씀해 주십시오.
“(한참을 망설이다) 굉장히 생각이 깊은 분이지요. 어떤 일이든 넓고 깊게 생각하셨고 확신이 서면 흔들림이 없으셨습니다. 그분을 놓고 보수냐 진보냐, 좌파냐 우파냐를 논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틀로 재단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런 걸 모두 넘어서는 분, 좀 더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면서 그걸 넘어섰던 분입니다.”
―추모사업을 두고 여러 제안이 쏟아지고 있는데요.
“절대 과해서는 안 되고, 서둘러서도 안 됩니다. 추기경님이 결코 원하지 않으실 겁니다. 추기경님을 내세워 덕 보자는 것도 말이 안 되죠. 그분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가롯 유다’처럼 천주교 내부에서 말년의 추기경님을 공격한 사람도 있습니다만.
“추기경님이 이에 대해 일절 언급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에 대해 마음 아파하셨지요.”
―추기경님을 마지막으로 뵌 것은, 그리고 마지막 말씀은….
“13일 오후입니다. 그때 이미 말씀을 못하셨습니다. 의식이 있으실 때 밤늦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래, 고마워’라고 하신 게 마지막 말씀이었어요.”
장례식이 열린 20일 추기경을 용인에 모시고 곧바로 춘천으로 돌아온 장 주교는 주말 내내 주교관에서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그가 22일자 춘천교구 주보에 실은 글은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며―가장 보잘것없는 형제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복음 25장 40절)’였다. 집무실을 나서 주교관으로 향하는 장 주교의 뒷모습이 무척 쓸쓸해 보였다.
춘천=오명철 전문기자 oscar@donga.com
최창순 기자 cscho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