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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플인메모리] 배대웅, 수비도 사업도 만점! 일류가 된 2루수

입력 | 2009-02-26 08:13:00


[국가대표 유격수 계보를 따질 때면 늘 김재박이 중심에 서 있다. 그 이전에는 김진영과 하일이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이후에는 류중일 이종범 박진만이 포진해 있다. 2루수는 어떨까. 해방 이후 성기영과 한동화의 대를 이은 사나이, 강기웅 박정태 박종호 시대 이전에 국가대표 최고 2루수로 이름을 날린 선수. 야구인들은 주저 없이 배대웅을 꼽는다. 1970년대 중반부터 프로야구가 탄생하기 전까지 1년 후배인 김재박과 7년간 국가대표 키스톤 콤비를 이루며 변방의 한국야구를 세계 정상권으로 이끈 ‘영원한 2루수’이자 ‘영원한 2번타자’. 86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뒤 지도자로 2001년까지 그라운드를 누빈 그가 이제는 사업가로 변신했다. 새로운 분야에서 성공가도를 질주하기 시작한 배대웅(55)을 만났다.]

○4개월만에 체인점만 5개 ‘소뚜레’ 사장님

172cm의 작은 키지만 다부진 몸매. 그는 반갑게 악수를 청했다. 특유의 작은 눈이 완전히 파묻힐 정도로 살가운 웃음을 지었다. 대구에서 신도시로 불리는 수성구 시지동. 그는 LA갈비 전문점 ‘LA 소뚜레’를 운영하고 있다. 250명이 앉을 수 있는 넓은 실내공간과 차량 80대가 동시에 들어설 수 있는 야외 주차공간. 작년 10월 말에 개업했는데 다달이 억대 수입을 올리고 있다며 싱글벙글이다. 종업원 25명에 한달 인건비만 3600만원. 현재 대구와 경북 지역에 체인점만 5개가 생기는 성황이다.

“예전부터 이걸 한번 했으면 생각했는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풀리면서 과감하게 시도했죠. 누가 보면 간도 크다 카겠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때문에 말도 많았잖습니까. 그래도 맛도 있고 싸니까 손님이 많이 오네요. 연말에는 미어터졌고.”

메뉴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가장 비싼 특갈비살 120g이 1만원, 다른 갈비살은 9000원, 8000원이 적혀 있었다. “박리다매지요. 요즘 경제도 어렵고 다들 힘들어 하잖아요. 닭고기나 돼지고기 값으로 먹을 수 있으니까 가족단위 손님들이 많이 옵니다. 4인가족이 고기 드시고 식사까지 해도 5만-6만원이면 해결되지요.”

그는 혼자 살고 있다. 아내와 아들딸은 13년 전 그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연수를 할 때 함께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아내는 현재 LA에서 스시바를 운영하며 자녀를 뒷바라지하고 있다. LA갈비도 함께 메뉴에 올려놓고 있는데 역시 크게 성공하고 있다.

“집사람이 미국에서 고기를 직접 보내와요. 미국에서 가게를 해보니 한국에서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더라고요.”

○천재 2루수, 스카우트 표적이 되다

1971년 경북고는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를 모두 휩쓸었다. 유일무이한 신화다. 당시 마운드에는 전설적인 철완 남우식이 버티고 있었고, 배대웅 천보성 정현발 등 동기생에다 황규봉 이선희 등 1년 후배들은 훗날 국가대표 주축선수로 성장하기도 했다.

“나갔다 하면 우승이었죠. 대진표 보고 경북고하고 붙는 상대팀은 서울역에 미리 표 끊어놓고 경기를 할 정도였죠. 당시 군부대 오픈카를 빌려 대구시내 행진을 하곤 했는데 처음엔 군대에서 쉽게 차를 빌려주다 우승할 때마다 빌려달라니까 거기서도 골치가 아팠나 보더라고.” 화석처럼 응고된 38년 전의 추억들을 되새기면서도 그는 마치 어젯일을 들추듯 즐거워했다.

고교 3학년 때 이들은 대학팀과 실업팀의 스카우트 전쟁에 휘말렸다. 그를 스카우트 하기 위해 한양대 박진원 감독, 고려대 하갑득 감독, 연세대 배수찬 감독, 상업은행 장태영 감독이 달려들었다. 그 전쟁을 뚫고 당시 기업은행 감독으로 대구의 집까지 찾아가 배대웅을 스카우트한 김성근(현 SK 감독)은 이렇게 회상했다.

“남우식 배대웅을 잡으러 대구에 갔지. 그런데 남우식은 한양대에 빼앗겼어. 모든 조건을 다 들어주고 배대웅을 잡으라는 오더가 위에서 내려오더군. 배대웅을 잡아 기분이 너무 좋아서 대구에서 술을 무지 많이 마셨어.”

기업은행은 그의 친구들이 모두 대학에 진학하자 야간대학 학비 전액과 하숙비까지 챙겨주었다. 배대웅은 가정형편이 어려웠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홀어머니 아래 성장했다. 그래서 곧바로 돈을 벌 수 있고, 당시 최고직장으로 꼽히던 은행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김재박과 7년간 국가대표 키스톤콤비 활약

그는 1975년 제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부터 프로야구 탄생 직전인 81년까지 국가대표 부동의 2루수로 활약했다. 불세출의 유격수 김재박과 함께 7년간 무적의 키스톤 콤비를 이뤘다. 김재박은 ‘그라운드의 여시’로 불렸고, 그는 ‘그라운드의 작은 여시’로 통했다. 아시아선수권 우승은 물론,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슈퍼월드컵에서 한국야구사상 최초 세계대회 우승을 엮었고, 1980년 도쿄에서 열린 제26회 세계선수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김성근 감독의 말이다. “재치가 있었고 다부졌어. 투낫씽(2-0)에도 번트든 히트앤드런이든 사인을 내면 다 해결했으니까. 지금까지 그런 2번타자는 보지 못했어. 수비도 최고였고. 어떤 상황에서도 볼이 몸 가운데에 가 있었어. 포구에서 공을 빼내 던지는 동작이 굉장히 빨랐고. 김재박이 화려한 유격수였다면 배대웅은 안정적인 2루수였지. 배대웅 앞으로 가면 ‘아웃카운트 하나 잡았구나’ 생각했으니까. 빈틈이 없었어. 요즘의 박진만 같이 믿음이 가는 수비수였어.”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실업시절이면 은퇴를 생각할 나이. 그러나 프로는 또다른 매력이었다. 삼성에서는 황규봉에게 최고연봉 1800만원을 안겼고, 이선희와 그에게 1700만원의 연봉을 책정했다. 그는 포철에서 나와 삼성의 초대 주장을 맡았다.

○사상 최초 몰수게임의 추억

그를 기억하자면 프로야구사상 첫 몰수게임이 떠오른다. 82년 8월 26일 대구구장 MBC 청룡전. TV로 생중계됐다. 삼성이 5-2로 앞선 4회말 1사 1·2루. 정현발의 유격수 앞 땅볼 때 1루주자 배대웅은 더블플레이를 저지하기 위해 슬라이딩을 했다. MBC 2루수 김인식은 높게 든 배대웅의 발에 걸려 넘어졌다. 프로 초창기 ‘쇼맨십’이라면 김동엽 감독과 함께 쌍벽을 이루던 ‘베트콩’ 김인식. 배를 움켜쥐고 그라운드에 데굴데굴 굴렀다. 경기가 중단됐다.

배대웅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김인식은 벌떡 일어나 코믹한 발길질을 하다 오른손으로 머리를 때렸다. 숨죽였던 관중들은 배꼽을 잡았지만 심판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김동앙 주심의 오른팔이 크게 돌았다. “김인식 퇴장!”. 그러자 MBC 백인천 감독은 수비수들을 모두 덕아웃으로 철수시켰다. 25분 뒤 결국 사상 첫 몰수게임이 선언됐다.

배대웅은 당시를 회상하며 웃었다. “김인식은 절친한 친구입니다. 국가대표도 같이 하고, 걔가 쇼맨십과 액션이 강하잖아요. 심판은 운동장에서 손찌검했다고 퇴장시켰지만 친구가 장난으로 그랬는데 경고도 없이 퇴장을 시켰어요. 실제로 우리 사이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다음날 술 한잔 하면서 둘이서 엄청 웃었죠.”

김인식 안양 충훈고 감독은 ‘몰수게임’ 얘기가 나오자마자 “제가 프로야구 퇴장 1호입니다. 그런데 제 아들놈이 프로 데뷔전에서 공 1개 던지고 퇴장 당했잖아요. 부자지간에 이게 뭡니까”라며 생뚱맞은 얘기부터 풀어놨다. 지난해 4월 19일 잠실 두산전에서 그의 아들인 SK 투수 김준이 7회 구원등판하자마자 초구에 유재웅을 맞혀 퇴장당한 것을 일컫는 얘기였다.

김 감독은 여전히 유쾌했다. “대웅이한테 장난으로 발길질 하고 한대 쥐어박았는데 그게 퇴장까지 될 줄은 몰랐죠. 실업시절에는 그런 장난도 많이 쳤거든요. 당시 어린이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프로야구가 생긴 거 아닙니까. 저는 팬들에게 재미를 주려고 그랬던 것인데 일이 그렇게 커질 줄 몰랐죠.”

○야구는 내 평생의 짐

소속팀에서, 대표팀에서 고달프게 움직였던 무릎이 고장났다. 83년 0.285의 타율을 올린 뒤 무릎수술을 했고, 85년에는 0.273의 타율로 통합우승에 일조했다. 실업시절의 쏠쏠한 타격솜씨를 발휘하기는 했지만 늦은 나이에 프로에 들어와 86년 은퇴할 때까지 통산타율 0.259(822타수 213안타)로 마감했다. 그러나 말년에는 승리를 굳히기 위해 투입되는 ‘마무리 2루수’로 활약할 정도로 그의 빈틈없는 수비솜씨는 여전했다. 연평균 4개꼴인 통산실책 20개. 82년 71경기에서 7개의 실책을 범한 것이 최다였다.

상대로서는 얄밉고, 소속팀으로서는 고마웠던 존재. 우리들 기억 속에 ‘영원한 2번타자 겸 2루수’로 자리잡고 있는 그는 이제 사업가로 날렵한 풋워크를 시작했다. 그러나 사업을 하면서도 야구를 버릴 수는 없다. 현재 KBO 육성위원과 리틀야구연맹 영남지부장을 맡고 있다. 이미 지난해 대구 수성구청장을 만나 리틀야구팀 창단에 뜻을 모았고, 리틀야구장 건립도 얘기가 오가고 있다고 한다.

“이젠 어린 애들 야구하는 걸 보고 보람 느껴야죠. 또래 친구들도 은행이다, 학교다 다 퇴직했어요. 그 친구들이 주말이면 유소년 야구 심판도 봐주고 그래요. 그게 보람이죠. 사업은 언제든지 관둘 수 있어요. 그러나 야구는 내 평생 짐이자 의무죠. 가난했던 배대웅이 이름 석자을 알릴 수 있었던 것도, 먹고 살 수 있게 해준 것도 야구 덕분이잖아요. 이젠 유소년 야구를 위해 뛰어야죠. 미국이나 일본을 보면 나이든 사람들이 어린이들 지도하는 모습 보기 좋잖아요.”

대구|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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