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운 한국살이 찡하게 보여 줄게요”
이달말 이주민극단 창단공연 연습 구슬땀
“한국아이들 놀 시간도 없이 공부… 불쌍해
남편들 집안일에 무신경… 섭섭할때 많아
문화 차이 이해하고 열린마음 가져줬으면”
지난달 말 서울 성북구 정릉동의 연극연습장 ‘그린피그’. 인종이 다른 20, 30대 여성 10여 명이 연기 연습에 몰두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한마디씩 주고받고 퇴장하는 거예요”라고 연출자가 지시하자 2명의 여성이 동시에 묻는다. “우리나라 말로요?”
‘우리나라 말’은 다름 아닌 한국어다.
한국어를 스스럼없이 ‘우리나라 말’이라고 하는 이들은 몽골 터키 페루 스리랑카 러시아 베트남 등지에서 왔다. 각기 다른 곳에서 태어났지만 벌써 한국 여성이 다 됐다.
베트남 여성 티응아 씨(32)와 짜미 씨(25)가 무대 중앙에 나설 차례. 티응아 씨가 다리를 절며 “아파요”라고 말하자 짜미 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어디 아파요?”라고 물으며 의자를 가져다 준다.
이들이 퇴장하자 스리랑카 출신의 이레이샤 씨(32)가 쟁반을 들고 등장한다. “떡 사세요∼. 떡 사세요∼.” 이레이샤 씨의 웃기는 억양에 다른 이주여성들이 와르르 웃는다.
○ “이주민의 애환 보여주고 싶어”
이들 여성은 이주노동자방송국(www.migrantsinkorea.net)이 만든 ‘극단 샐러드’의 창단공연을 위해 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창단은 3월 말.
이들은 즉흥연기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한 분위기였지만 연습이 진행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연기에 몰두했다.
연출자인 윤한솔 씨는 “아마추어 연기자들이라 감정 표현은 서툴지만 이들이 한국에서 겪은 심리적 갈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 말했다.
극단 샐러드는 이주노동자의 고민과 애환을 담은 연극과 뮤지컬을 선보일 예정이다. 샐러드라는 이름은 ‘뒤섞여 있어도 고유의 맛을 그대로 간직한다’는 ‘샐러드볼(Salad Bowl)’이란 말에서 따왔다.
박경주 이주노동자방송국 대표는 “한국 사회가 이민자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왜곡돼 있다”며 “이주민들이 한국 생활에서 겪는 에피소드를 가감 없이 보여줄 것”이라고 말했다.
창단 공연은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 이야기’를 이주여성의 애환과 내면이 담긴 내용으로 각색해 선보일 계획이다.
○ “서로 문화 이해하려는 노력 필요”
이들은 3시간 동안 연극 연습을 끝낸 후 빙 둘러앉아 얘기를 시작했다. 어느덧 익숙해진 한국생활이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터키에서 온 예심 씨(29)가 “한국의 교육열이 놀랍다”며 입을 떼었다. “아이들 공부하는 시간 너무 많아요. 부모는 돈 많이 들고 아이는 스트레스 많이 받아요. 아직 초등학생인데도 그래요.”
몽골 출신 서열마 씨(30)가 “공부 많이 해야 하니까 집안일 배울 시간도 없고, 엄마랑 지내는 시간이 적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는 “다 크도록 돈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는 아이가 많다” “시집가면 일은 며느리만 하는 게 몽골하고 다르다”고도 했다.
짜미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며느리가 시어머니한테 자기 의견을 말하기 힘들다”며 거들었다.
남편에 대한 얘기도 빠질 수 없다. 이레이샤 씨는 “한국 남편들은 아기를 잘 돌보지 않는다”며 불만을 털어놓았다.
빅토리아 씨(30)도 같은 생각이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부부가 청소도 같이 하고 애도 같이 키우는데 한국 남편들은 집안일에 별로 관심이 없다”며 “남편 친구들 만날 때는 나도 같이 나가는데 내 친구들 만날 때는 남편이 함께 가려 하지 않아 섭섭하다”고 말했다.
양국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도 대화에 나왔다. 빅토리아 씨는 “시집 식구들이 내가 태어나서 자란 나라의 문화를 이해해 주지 않고 ‘한국에 왔으니 알아서 적응하라’는 식으로 대할 때는 서운하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티응아 씨 생각도 마찬가지다.
“한국 남편과 외국인 아내가 서로 문화를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나이 차도 많이 나고 문화도 달라 싸울 때가 있어요. 국제결혼을 하고 싶다면 남편은 아내 문화를 배우고 아내는 남편 문화를 배워야 해요.”
○ 고국 그리워도 이미 한국사람
이들은 얘기가 끝나자 짐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베트남 출신인 티응아, 짜미, 안다오 씨(36)는 식사를 하면서 좀 더 얘기를 나누기로 했다.
이들이 택한 메뉴는 청국장과 제육볶음. 이들은 “이제 베트남 음식보다 한국 음식이 더 입에 맞는다”면서 웃었다.
짜미 씨가 티응아 씨를 보며 “운명(팔자)이 좋다”고 말했다. 남편 잘 만났고 직업도 잘 잡았고 시부모도 좋다는 말이다.
티응아 씨는 2003년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와서 경기 광주시의 한 회사에서 일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행복하지만 말이 서툴러 마음속 얘기를 못하니까 정말 답답하다”고 했다. 베트남에서는 경제적 문제로 부부가 자주 다투는데 한국에서는 그럴 일은 없다는 것. 그렇지만 언어소통이 잘 안 돼 답답한 점이 있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이들은 작별 인사를 했다. 짜미 씨가 안다오 씨에게 가방 하나를 건넸다. 입지 않는 옷을 담은 보따리다. 안다오 씨가 “고맙다”며 웃었다. 각자 집으로 향하는 이들. 서로 옷을 돌려 입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
▼결혼이주여성 “가장 큰 어려움은 남편과 소통부재… 남편이 가족갈등 중재 역할 못하면 결혼 실패 가능성 커”
보건사회硏 1094명 조사▼
결혼이주여성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뭘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다문화시대를 대비한 복지정책방안 연구’에 따르면 ‘배우자와의 의사소통’이다.
결혼이주여성 1094명 가운데 95.1%에 해당하는 1040명이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다”고 답했다. 319명(29.2%)은 “배우자와의 의사소통”을 가장 큰 어려움으로 꼽았다.
한국인 배우자도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한국인 배우자 975명 중 267명(27.4%)은 “의사소통이 어렵다”고 답했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결혼 기간별로 큰 차이가 있다. 결혼 기간이 2∼4년 미만으로 짧을 때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가장 심하게 호소했다. 결혼 기간이 4년 이상으로 길어질수록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줄어드는 반면 자녀 문제의 어려움이 커졌다.
결혼 기간이 지속되면서 한국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부담감, 자녀문제, 배우자 가족과의 관계, 경제문제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는 추세다.
결혼 전 기대한 것과 실제 생활 사이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 부분에 대해서는 “본국과 한국의 문화 차이”라는 대답이 많았다.
박경주 이주노동자방송국 대표는 “결혼이주여성은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남편과 시집 분위기에 힘들어 한다”며 “다른 문화에서 자란 사람에게 한국에서 자란 사람이나 가능한 일을 바라는 것이 갈등의 원인”이라고 말했다. 특히 농어촌에 사는 결혼이주여성이 이런 갈등을 많이 겪게 된다는 것.
그는 “남편과 대화가 되지 않고, 남편 이외 가족들과 생긴 갈등에서 남편이 중재자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경우 결혼생활에 실패할 공산이 매우 크다”고 덧붙였다.
결혼 후 이용하는 언어를 묻는 질문에 이주여성 48.4%는 “생활에 필요한 짧은 대화 정도 가능하다”고 했고, 22.9%는 “간단한 단어를 말하는 정도 가능하다”고 답했다. 3분의 2 이상이 한국어로 소통하는 데 미숙한 것이다. 반면 한국인 배우자 10명 중 9명은 한국어로만 대화한다고 답했다.
김유경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가족여성복지팀장은 “한국인 남편과 외국인 아내 사이에서 한쪽의 언어와 문화생활을 강요해선 안 된다”며 “쌍방 국가의 언어와 문화를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현지 기자 nu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