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책갈피 속의 오늘]1971년 한미 ‘프리덤 볼트’ 훈련

입력 | 2009-03-04 02:54:00


―將軍이 제一번으로 낙하하는 모습을 보았소. 날씨가 쌀쌀한 편인데 춥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는 이런 추위에는 단련돼 있습니다. 더구나 나는 韓國戰線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 한국 기후에는 익숙하지요.”

동아일보 1971년 3월 5일자 내용이다. 인터뷰에 나오는 장군은 조지 S 블랜차드 소장으로 미 기동타격사령부 소속 제82공수사단 사령관. 시종 파이프를 입에 물고 꼿꼿이 선 채로 얘기했다고 한다.

블랜차드 소장의 부대는 한미연합 공수기동연습인 ‘프리덤 볼트(자유의 도약)’ 작전에 참가하려고 3월 4일 한국에 도착했다. 오산 공군 기지에 침입한 가상적 ‘하타갈’ 군을 격퇴하는 내용.

전술통제팀 49명이 선발대로 오전 8시 반에 C-141수송기에서 뛰어내려 비상통신망을 가설하고 낙하지점을 표시했다. ‘통바지를 입은 악마’라는 별명의 504낙하산 연대 2대대 800여 명은 지상병력의 유도를 따라 블랜차드 소장을 시작으로 오전 10시부터 투입됐다.

조문환 특전사령관의 뒤를 이어 한국군 225명이 8분 뒤에 C46 수송기에서 낙하했다. 이어 한미 공군의 F-5A, F-86, F-4D 전폭기가 적진을 맹공하자 양국 특전부대는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연합군은 5일 새벽부터 곡사포와 박격포의 지원을 받으며 게릴라 잔당을 완전 소탕해 30만 m²에 이르는 공두보를 확보하고 오전 11시 45분부터 오후 6시까지 증원부대와 임무교대에 들어갔다.

블랜차드 장군은 한국의 추위에 익숙하다고 말했지만 미군 병사들은 영하의 기온에서 적의 눈에 띌까봐 모닥불을 못 피우고 오들오들 떨다가 콜록콜록 기침을 했다고 기사는 전한다.

한미연합 군사훈련의 시초는 ‘포커스 레티나’. 1968년에 청와대 기습사건과 푸에블로호 납북사건 등 북한의 도발이 계속되자 이듬해 3월 실시했다. 미 본토에서 완전무장 병력 2500여 명을 수송기로 31시간 만에 한반도에 투입해 사상 최장 최대의 공수작전이라는 평을 들었다.

프리덤 볼트는 닉슨독트린에 따른 미 7사단의 철수에 앞서 한반도 방위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계획했다. 베트남 공산화로 한반도 긴장이 고조되자 한미 양국은 1976년 ‘팀 스피릿’ 연습을 시작했다. 첫해에 4만6000여 명이 참가했다가 규모가 점차 늘어 1984년에는 20만7000여 명을 투입하는 서방 최대의 군사 기동훈련으로 변했다.

팀 스피릿은 한반도 정세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비핵화 공동선언 등 남북화해 무드가 조성되자 1992년에 취소했고, 북핵문제가 악화되자 1993에 다시 실시했다.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협정을 체결한 1994년 이후 중단됐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