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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의 경쟁력]만화가 김수정

입력 | 2009-03-08 10:54:00


[이남자, 이여자의 경쟁력] 만화가 김수정의 '관찰력'

- "둘리의 모험담은 우리가 매일 겪는 이야기"

아기공룡 둘리가 돌아왔다. 1983년 만화잡지 '보물섬' 연재로 시작해 1987년 KBS 만화영화로 방영됐던 둘리가 21년 만에 TV로 돌아온 것. 현재 SBS에서 매주 목요일 방송되는 '아기공룡 둘리'는 만화영화로는 드물게 4%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부모와 아이들을 동시에 TV 앞으로 불러 모았다.

둘리는 1996년 극장용 만화영화 '얼음별 대모험'으로, 2001년 뮤지컬 '둘리'로도 제작됐고 둘리 캐릭터가 담긴 상품만 해도 2000종이 넘는다. '국민 캐릭터'라 할만 하다.


▲ 동아닷컴 임광희 기자

둘리가 세대를 뛰어 넘어 공감을 얻는 걸출한 캐릭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스토리텔링의 힘'이다. 비록 상상 속에서 탄생한 아기공룡이지만 그의 일상은 현실에서 있을 법한 개연성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

상상력과 개연성은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걸까?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둘리나라' 사무실에서 만난 둘리아빠 김수정(58)씨에게 화두를 던져 보았다. 그는 "다들 만화가 허무맹랑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는 가급적 피한다"며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주변 사물들을 꼼꼼히 관찰하고 그 이면까지 추리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답했다. 오늘날의 둘리를 만들어낸 것은 다름아닌 '관찰력'의 힘이었다.

● 호빵 같은 둘리? 사나운 케라토사우루스가 모델

누구도 상상하지 못 했던 둘리의 외모는 김 작가가 공룡 관련 서적을 탐독하다 적당한 모델을 찾은 것이다. 둘리가 호빵을 가득 문 듯한 두 볼을 가졌어도 사실은 포악한 육식공룡인 '케라토사우루스'가 모델이다. 점차 다듬어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뿐 처음 스케치한 둘리는 아주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공룡이 1억 년 전 멸종된 동물인데 21세기까지 존재하려면 그럴싸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공룡이 떨어졌다 하면 독자들이 몰입하기 힘들죠. 그래서 빙하기에 냉동되어 가사 상태에 있다가 얼음이 녹으며 깨어난 것으로 설정을 했죠."

실제 남극 빙하가 서울 한강까지 올 가능성이 있는지 과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했다.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가능한 이야기라는 답변을 들었다. 세계지도에 빙하가 움직이는 경로를 일일이 표시해 보고 뿅망치로 얼음을 때리면 깨지는지 여부도 확인했다.

둘리의 친구 '또치' 역시 '시조새'다, '오리'다 논란이 분분하지만 라스베가스 서커스에서 탈출한 타조가 맞다. 또치가 늘 하고 있는 빨간색 목도리는 타조의 목털을 표현한 것이고, 머리모양도 타조를 닮았다. 아기 타조로 설정했기 때문에 부리를 노란색으로 강조했을 뿐이다.

● 빵집 돌며 여고생들 이야기 귀동냥하기도

모든 일을 경험해 보아야만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981년 '여고시대'에 연재되며 여고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오달자의 봄'을 연재할 때 김 작가는 30대 아저씨였다. 그는 늘 여고생들의 신비한 세계를 탐험하고 다녔다고 한다.

"여학생들이 조금씩 빵집이나 튀김집을 다니기 시작하던 때였죠. 빵집에 앉아서 여학생들 이야기를 귀동냥을 하고 빵도 사주며 말도 걸어보고… 그게 하루 일과였어요. 그 때 들은 이야기들을 시작으로 유추를 해 가는 것이죠."

여고생들이 이성에 대한 호기심은 있지만 남학생들을 만날 수 없는 분위기다, 그러다 보니 보통 선생님에게 연정을 느낀다…, 평범한 여고생인 오달자가 대머리 선생님에게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선은 그렇게 세밀해졌다.

"항상 번쩍 하고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에요. 방에 담배랑 재떨이가 놓여 있다고 합시다. 담배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가능한 이야기를 계속 유추해 갑니다. 담배를 피웠다, 재가 떨어졌다, 연기가 난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를 물고 흘러가는 것이죠. 건성건성 무심코 지나가면 프로라 할 수 없어요."

그렇게 꼼꼼히 관찰하고 논리의 틀을 완성해도 가끔 오류가 발생한다. 둘리가 육식공룡인데 엄마가 초식공룡으로 완전히 다른 종이 되어버린 것처럼. 푸근하고 고향 같은 엄마 공룡을 찾다보니 거대한 초식공룡인 '브라키오사우루스'가 둘리 엄마의 모델이 되었다. 몇 년 걸려 연재를 하다보니 둘리가 육식공룡임을 그만 깜빡해버린 것.

"엄마 공룡이 등장하고 한참 후에 종이 다르다고 독자가 지적해서 아주 난감해졌어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슨 핑계를 댈까 하는 강박관념이 생겼다니까요. 그래서 아직까지 둘리 아빠를 등장시키지 못 하고 있죠. 혼자서 둘리가 양자라고 할까, 알이 바뀌었다고 할까, 만화라고 출생의 비밀이 없으라는 법 있나 이렇게 궁핍한 변명을 찾곤 하죠."

● 어릴 적 경험이 소박하고 따뜻한 만화의 재료

그는 11남매 중 8번째다. 다들 궁핍했던 시절, 그의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남 진주시 중앙시장 근처에 살았던 그는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왔다. 신문배달, 우산장수, 아이스크림 판매상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당시 경험들이 '일곱 개의 숟가락' '1남 4녀 막순이' 등 만화에 많이 스며들었다.

"제가 살던 시장통엔 온갖 인간 군상들이 모여 있었어요. 부자도 있고 하루살이 장사치도 있고…사연 없는 사람이 없어요. 다들 '지나 내나' 하며 아웅다웅 살아가죠. 그래서 제 만화에는 선악이 분명하지 않아요. 길동이가 악역을 맡지만 박봉에 뜨내기 식구들을 돌보는데 나쁘다고 할 수 있나요?"

1987년 '아기공룡 둘리'를 보고 자란 지금 30~40대 들은 이제 고길동의 팍팍한 삶을 이해하게 되었고 희동이의 재롱에 미소 짓는다. 어린 시절에는 둘리에게 동질감을 느끼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길동을 보는 시선이 따뜻해진다. 하나의 삶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는 법. 각자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질 뿐이다.

"가난한 형편에 서로 지지고 볶고 원수처럼 싸우면서 자랐으면 지금보다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았겠죠. 그런데 부모님은 사랑이 지극하신 분들이셨어요. 항상 주변 사물에 대해 따뜻한 애정을 갖고 소중하게 느끼도록 키워주셨죠."

● "심의가 살벌해 공룡까지 불러냈죠"

둘리는 생김새는 공룡이지만 밥상에 끼어앉아 된장찌개를 먹고 심부름을 하고 말썽을 부린다. '호이 호이~'하는 초능력을 가졌지만 제대로 소원이 이뤄진 적은 없다. 판타지인 척 하지만 우리가 부딪히는 소소한 일상을 담았다. 이는 심의를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둘리가 탄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화책이 도덕교과서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했어요. 심의가 살벌했죠. 도둑을 쫓더라도 어른인 도둑한테는 '도둑님이 도망가신다'고 해야 했을 정도로요. 아이는 아이다워야 하는데 묘사가 불가능했죠. 동물을 등장시키면 심의가 덜 까다로우리라 생각해서 둘리, 또치, 도우너가 나왔어요."

그는 지구인을 애완동물로 오해하는 외계인 도우너가 가장 아이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자연스럽게 어른한테 반말하고 반항하도록 하기 위한 설정이 필요했다. 그런데도 심의에 걸려 여기저기 화이트 물감이 덧칠됐다고 한다. 그래도 심의가 있었기에 둘리 같은 캐릭터가 나온 것 아니냐고 반문하자 그는 목소리가 커졌다.

"길동이 운전면허를 따려고 운전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둘리는 핸들, 또치는 클러치, 도우너는 브레이크로 정해 놓고 연습한답시고 밟는 거예요. 이 장면이 아이들을 포악하게 다룬다며 심의에 걸려 책으로 출판되면서 삭제되었어요. 그저 허허 웃으면 괜찮은데 학대를 한다고 정색을 하면 상상력이 심하게 위축됩니다. 심의만 없었다면 훌륭한 한국 만화가 훨씬 많을 겁니다."

돌아온 '아기공룡 둘리'는 전보다 악동이 되었다. 김 작가는 '아기공룡 둘리'가 처음 '공영방송'에서 전파를 탔을 때 둘리가 너무 순종적이고 착하게 그려졌던 게 마뜩치 않았다. 지금의 까칠한 둘리가 원작에 보다 충실한 둘리다.

● 영원한 아이들의 친구 김파마 아저씨

그의 작업실 한 쪽 벽에는 10대들을 다룬 신문기사들이 붙어 있다.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 항상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감수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만화가로서 저의 재능은 산에서 들에서 뛰어 놀며 길러졌죠. 아이들한테는 놀이가 공부인데… 늦둥이인 여섯 살 막내도 나가 놀라고 하고 싶지만 정작 공간도 친구도 없어 학원에 가요. 제가 어릴 적 생각하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싶어요."

그가 "보고 있어도 답답한데 아이들은 얼마나 숨이 막힐까요"라고 되묻는 걸 보면 그는 예순의 나이에도 아이들의 친구였다. 마냥 일곱 살에 머물며 동심을 휘젓고 다니는 둘리의 모습에 만화가 김수정의 모습이 그대로 겹친다.

"앞으로 둘리 시즌 2, 시즌 3을 계속 만드는 게 꿈이에요. 아이들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일이 소명인걸요."

우경임기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