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흔적을 지워라”
조선 개국 직후인 1396년 축조된 한양 도성(서울성곽). 몇 차례의 보수와 개축을 거쳤지만 조선 말기까지는 원래의 모습이 잘 유지됐다.
그러나 19세기 말 개화의 물결이 몰아닥치고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서울성곽은 수난을 겪기 시작했다.
첫 주범은 전차였다. 1899년 서울 시내에 전차 선로를 설치하면서 돈의문(서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주변의 도성 일부를 헐어냈다.
이어 일제의 침략 과정에서 서울성곽의 시련이 이어졌다.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제는 1907년 성벽처리위원회라는 기구를 만들어 서울성곽 철거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당시 일제의 통감부는 이렇게 주장했다.
“선인(鮮人) 동화를 위해 간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산성(山城)이란 것이 조선 도처에 있고 고명찰(古名刹), 가람(伽藍) 등은 거의 배일(排日)이란 역사적 재료를 가지고 있다. 몇 년에 왜적을 격퇴했다든지 하는 등의 글귀가 변기에조차 써 있다. 점차적으로 제거해야 선인 동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제는 같은 해 일본 왕자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숭례문(남대문) 바로 옆의 성곽 일부를 헐어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곤 1908년 3월 11일, 일제는 흥인지문 주변의 성곽을 헐어내고 본격적인 성곽 철거에 들어갔다. 급기야 1915년, 도로를 확장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돈의문까지 흔적도 없이 파괴해 버렸다.
전차 노선을 놓는다고 우리 스스로 돈의문과 흥인지문 옆 성벽을 헐어내더니 일제에 의해 서울성곽 곳곳이 헐려나가는 수모를 당한 것이다.
돈의문과 달리 숭례문과 흥인지문은 철거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문화재로서의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일본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숭례문은 일본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입성한 곳이고 흥인지문은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입성한 곳이다. 일제는 일본인 장수가 지나갔던 장소라는 이유로 철거하지 않았으니, 우리로서는 오히려 더 치욕이 아닐 수 없다.
서울성곽은 원래 18.9km에 달했다. 그러나 이렇게 파괴되면서 현재 남아 있는 서울성곽의 길이는 10.5km에 불과하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