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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가 된 운명적 만남…‘그 순간 역사가 움직였다’

입력 | 2009-03-14 02:58:00


◇ 그 순간 역사가 움직였다/에드윈 무어 지음·차미례 옮김/440쪽·1만6500원·미래인

18세기 프랑스 역사를 말할 때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열일곱 살이었던 로베스피에르가 루이르그랑 학교의 학생일 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를 만난 장면이다. 그는 학교 정문을 통과하는 왕에게 환영사를 할 학생 대표로 뽑혔다. 2시간 동안 비를 맞으며 기다린 끝에 마차가 도착하자 그는 무릎을 꿇고 환영사를 읽었지만 왕은 마차 밖으로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 혁명기에 자코뱅당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했다. 급진적 성향인 자코뱅당의 주장에 따라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왕비는 1793년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빗속에서 환영사를 읽었던 소년이 후일 자신들을 죽음으로 내몰 줄은 몰랐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프리랜서 작가인 저자는 이처럼 세계사에 기록된 유명인들의 ‘만남’ 100가지를 모았다.

5세기 중반 교황 레오 1세와 훈족 아틸라 왕의 만남은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준 만남으로 꼽힌다. 레오 1세는 당시 북부 이탈리아 지역을 약탈하던 아틸라 왕을 만나 로마에 대한 침략을 중지해 달라고 부탁했다. 아틸라 왕은 교황의 말을 경청했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유럽 문학사에 길이 남은 만남은 1274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있었다. 단테가 평생의 연인인 베아트리체를 만난 것이다. 당시 아홉 살이던 그는 한 살 아래의 베아트리체를 만난 뒤 ‘여신과 같은 존재다, 이제 곧 내게로 와서 나를 지배하게 될 존재다’란 기록을 남겼다. 단테는 ‘신곡’에서 1290년 24세의 나이로 사망한 베아트리체를 천국의 안내자로 등장시켰다. 1812년 보헤미아 휴양지에서 만난 베토벤과 괴테는 재미있는 일화를 남겼다. 함께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오스트리아 왕비와 귀족들과 마주쳤다. 고귀한 신분을 지닌 인간보다 천재성을 타고난 인간이 우월하다고 공언해 온 베토벤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귀족들 사이를 뚫고 지나간 반면 괴테는 왕비에게 공손히 절을 했다. 베토벤은 나중에 괴테를 질책했다. 저자는 “이 장면은 새롭게 떠오르는 낭만주의 예술의 천재가 낡은 구시대의 관습을 짓밟은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전해진다”고 소개했다.

사회주의자였던 버트런드 러셀이 1920년 러시아 여행 도중 레닌을 만난 뒤 남긴 기록도 눈길을 끈다. 그는 러시아에서 진행되던 공산주의 실험에 대해 칭찬할 거리를 찾지 못한 것은 물론 레닌에게서도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레닌에 대해 “실망스러웠다” “사람됨에서 장난기 섞인 잔혹성을 발견했다”고 썼다.

젊은 시절 접한 프로이트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은 화가 달리는 프로이트가 영국에 있을 때 그를 찾아갔다. 프로이트는 달리에게 “옛 대가들의 작품에 비해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별로 호감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지만 달리를 만난 뒤로 ‘미친 사람들’로 여겼던 초현실주의자에 대한 생각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이 책에는 바흐가 1712년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를 만난 자리에서 부탁을 받고 즉흥적으로 ‘음악의 헌정’을 작곡한 일, 카사노바가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에서 루이 15세의 연인 퐁파두르 부인을 만나 탁월한 말솜씨로 마음을 사로잡은 이야기, 1963년 16세의 빌 클린턴이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악수한 것을 계기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키우기 시작했다는 일화 등이 소개됐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