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김탁환 정재승 소설 ‘눈 먼 시계공’]

입력 | 2009-03-17 13:29:00


51회

석범이 딱딱하게 이야기를 이었다.

"범행 현장에 퍼그 한 마리가 주인을 따라 죽어 있었습니다. 노박사님은 여러 차례 개의 뇌를 적출하여 다양한 실험을 하셨더군요."

"스티머스를 통해 퍼그의 마지막 기억을 영상으로 뽑아내려는 시도를 했겠지요?"

민선이 정확히 맥을 짚었다. 자신이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뇌를 꺼내 스티머스로 작동시켜 보았습니다만…… 실패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석범은 충분히 미끼를 던졌고 이제 민선이 그 미끼를 물 차례였다.

"조건이 하나 있어요."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다.

"뭡니까?"

"스티머스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질 때, 퍼그의 뇌를 스티머스로 분석한 결과를 가장 먼저 논문으로 발표할 기회를 제게 주세요."

까칠할 뿐만 아니라 욕심꾸러기다.

"알겠습니다. 대뇌수사팀장의 자격으로 노박사님께 기회를 드리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흠…… 좋아요. 그럼 퍼그의 뇌는 어딨죠? 또 스티머스는?"

석범이 재빨리 일어섰다.

"옆방입니다. 가시죠."

석범과 민선이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앨리스가 장액에 담긴 퍼그의 뇌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민선이 이광자 현미경 (Two photon microscope)을 통해 퍼그의 뇌를 다양한 각도로 살피며 혼잣말을 했다.

"나쁘지 않군. 전전두엽뿐만이 아니라, 전전두엽에서 해마로 가는 신경트렉까지 건드리지 않고 적출한 솜씨도 괜찮고, 후각뇌피질(entorhinal cortex)까지 함께 잘라낸 것도 좋고! 퍼그의 뇌 자체 문제는 아니겠군."

그리고 고개를 돌려 앨리스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그럼 어디 스티머스를 작동해 봐요."

회색 화면에 여러 방식으로 영상들이 조합됐지만 제대로 된 패턴을 찾지 못하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긴장감도 점점 높아졌다. 앨리스가 민선을 슬쩍 보며 툴툴거렸다.

"계속 이 상탭니다. 고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민선이 앨리스를 무시하고 석범과 눈을 맞췄다.

"스티머스의 원리를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제 생각과 일치하는지 우선 확인하게요."

"짐작하시겠지만, 스티머스는 인간 신경세포의 특성들 그러니까 세포막 전위, 활동 전위, 시냅스 특성, 리셉터 분포 등을 반영하여, 그것들이 네트워크를 이루었을 때, 전전두엽의 시냅스 강도 분포를 통해 마지막 단기 기억을 영상으로 재현합니다. 퍼그의 뇌에 이 원리를 적용했지만 영상은 보다시피 나오지 않았습니다."

"스티머스를 통해 퍼그의 전전두엽에 있는 신경세포들 간의 시냅스 강도 분포를 얻어냈겠군요."

"그렇습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습니다만."

민선이 무엇인가 알아낸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앨리스에게 말했다.

"잠깐만 나와 보세요."

앨리스가 불만이 가득한 눈으로 석범을 쳐다보았다. 석범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지못해 일어서며 물었다.

"문제점을 찾은 겁니까?"

이번에도 민선은 앨리스를 무시한 채 석범에게 설명했다.

"시냅스 연결 강도 분포가 단기기억을 표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영상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신경세포 하나하나의 성질을 정확히 알아야지요. 퍼그 뇌 신경세포의 전기생리학적 특징은 사람의 신경세포와는 다를 텐데요. 개에 맞는 데이터 값을 입력해야 합니다. 그리 하셨습니까?"

"그, 그 과정을 빼먹었습니다. 허면 어떤 값부터……."

민선이 말허리를 잘랐다.

"휴지기 때의 세포막 전위와 활동 전위 모양 그리고 시냅스에서의 리셉터 분포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람의 뇌에 맞춘 변수값을 퍼그의 신경세포에 해당하는 변수값으로 바꿔주면 영상화가 가능할 수도 있겠지요. 어디 한 번 볼까요?"

민선이 스티머스의 데이터 값을 하나하나 바꾸기 시작했다. 손놀림이 빠르고 주저함이 없었다. 석범과 앨리스 그리고 민선의 시선이 회색 화면으로 향했다.

20분 즈음 지났을까.

강물의 소용돌이 같던 영상들이 갑자기 큰 지류를 만난 듯 사선을 긋더니 수평으로 흔들렸다. 그 순간 민선이 어린 딸을 타이르듯, 주문처럼 속삭였다.

"착하지? 네 고통과 슬픔을 다 보여줘. 착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