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중년의 터닝포인트]정한진 씨- 미학도에서 요리사로

입력 | 2009-03-17 15:17:00


** 이 기사는 저널로그 기자 블로그에 등록된 글입니다 **

Before: 프랑스 파리8대학 미학 전공 박사과정
After: 요리사
Age at the Turning Point: 40

정한진 교수(47· 창원전문대 식품조리과)는 인터뷰 요청을 한사코 거절했다. "내 인생전환은 극적이지 않으니 차라리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도 했다. 한번 만나만 달라고 졸라 겨우 만난 뒤에도 계속 그는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한 자신의 성격을 탓했다.

그는 프랑스 파리8대학에서 미학 전공 박사과정을 밟던 2002년 진로를 바꿔 요리사가 되었다. 나이 마흔이 되던 해였다. '르 코르동 블뢰' 요리 과정을 수석 졸업한 뒤 한국에 돌아와 요리사로 일했고 지금은 학생들에게 요리를 가르친다.

그는 "인생전환은 결코 멋지고 낭만적인 일이 아니라 엄혹한 결단"이라면서 "모든 현실적 문제를 다 따져보고 난 뒤에도 여전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때 선택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원하는 일을 향해 떠나는 행위를 낭만적으로 상상했다면, 현실을 환기시켜주는 그의 말을 기억해둘만 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라. 단, 그 때부터가 더 어렵다."

● 몸을 쓰는 세계에 매혹되다

1996년 파리 유학길에 오를 때 그는 부부유학생이었고 딸아이는 만 두 살이었다. 그간 저축한 돈으로 5년쯤 버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외환위기가 터졌다. 1프랑에 150원이던 환율이 340원까지 올랐다. 생각보다 더 빨리 돈이 축나는 상황에서 그는 "내가 정말 공부 체질인가" 회의하기 시작했다.

"중학생 때부터 미학에 매료됐고 대학에 갈 때에도 부모와 싸워가며 미학과를 선택했어요. 그랬는데 한국과 달리 어느 누구도 밀어붙이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하는 환경에 처하면서, 내게 과연 학문적 자질이 있는지 심각한 회의가 들었어요."

"계속 책상물림으로 사는 게 즐거울까" 자문하던 그의 눈에 요리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의 집에서 유학생들이 모일 때마다 그가 족발, 잡채, 양장피 같은 요리를 척척 해내는 것을 보고 선후배들이 '박사 말고 요리사를 해보라'고들 농담하던 터였다.

"요리를 배운 적은 없는데 어디 가서 맛있는 걸 먹으면 집에 돌아와 그대로 만드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요리를 좋아해서 어머니가 장을 담글 때도 메주 찧고 손질하고 엿기름 곱는 일을 같이 했거든요. 오죽하면 고3때 시험이 내일모레인데 김장을 같이 담갔겠어요. 그게 제겐 자연스러웠어요. 결혼 이후에도 김치는 계속 제가 담갔으니까요."

요리를 해보고 싶다고 하니까 아내도 반대하지 않았다. '르 코르동 블뢰'의 제과제빵, 요리, 와인 3가지 과정을 동시에 등록해 다니면서 "몸을 쓰는 다른 세계"에 매혹되기 시작했다. 길을 바꾸기로 결심하고 한국에 돌아와 한 달 간 설득 끝에 부모의 허락을 받았다.

"요리사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나이 마흔에 무슨 환상이 있겠어요. 저는 가장이고 잘못하면 가족 모두 나락으로 떨어지는데, 불안하지요. 게다가 어떤 일이든 늦게 시작하는 건 절대로 유리한 고지가 아닙니다. 직업을 바꾸면 정말로 죽자 사자 매달려야 해요."

● 항로를 바꿔도 갈등의 본질은 여전

책상 앞에만 앉아 있다가 요리를 배우다 보니 "몸을 움직이는 일이 내 본성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었다"고 한다. 몸을 쓰는 구체성의 세계로 옮겨오니 자신이 오래 속해있던 추상성의 세계에서 해방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는 9개월 만에 요리 과정을 1등으로 졸업한 뒤 곧바로 파리 레스토랑에서 실습생으로 일하며 도제식으로 요리를 배웠다. 아침마다 도마 수십 개와 요리 도구를 제 자리에 배치하고 수십 마리의 닭 뼈를 씻어 기름 떼고 피 빼고 목욕탕 욕조 크기만 한 냄비에 넣어 육수를 끓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하루에 10여시간 서 있느라 자다가도 다리에 쥐가 날 정도였고 욕설이 끊이지 않는 거친 주방에서 자식뻘 되는 요리사들에게 욕을 들을 때도 있었지만, 배수진을 친 그에겐 물러설 곳도 없었다.

6개월 실습을 마치고 귀국한 뒤 그는 강남의 부티크 레스토랑인 '라미띠에'와 '일 마레' 등을 거쳐 현재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그는 "해보고 싶은 내 요리가 있는데 자본도 없고 독립의 어려움을 뛰어넘지 못했다"면서 "나는 모험을 피한 셈"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인생전환을 결심할 때의 갈등은 지금도 여전하다고 했다. 자신만의 요리를 하고 싶은 마음과 생계를 위해 마뜩치 않은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은 이전에 공부할 때 느꼈던 갈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은 인생의 항로를 바꿔도 여전히 맞서야 하는 과제였다.

● 삶 속에서 맛과 멋을 통합

인생전환 이후 그는 "이전보다 더 오기가 생겼고, 자기 기술에 대한 애착을 갖고 일하는 사람,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요리사를 하지 않았더라면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토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인문학 전공자의 해석, 그럴만한 여유는 잃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생애의 경험들이 결국은 통합되어 간다고 느껴지진 않을까. 그는 요리사로 일하면서 틈틈이 '왜 그 음식은 먹지 않을까' '향신료 이야기'등의 책을 썼다. 미학 공부를 할 때에도 예술품을 미적 대상이라기보다 사회적 산물로 다뤘듯, 그는 음식 역시 문화적 산물이라고 믿는다.

"별 볼 일 없는 음식에도 생애의 추억, 개인의 정서가 담겨 있고 시대, 문화를 볼 수 있잖아요. 음식을 통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그런 작업이 내 삶에서 경험의 통합이라면 통합이겠지요."

그는 '맛있다'는 개념을 시골에서 뜬 된장 같은 맛으로 정의했다. 발효식품처럼 기다리는 음식, 느린 삶이 후퇴하는 삶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이 맞물려가는 삶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음식문화 개선을 위해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슬로 푸드와 연관된 삶을 사는 방식을 현실화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